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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 Aug 31. 2023

등단하지 말란 말이야

등단, 그 의미와 가치



며칠 전 인터넷을 하다가 재미난 프로필을 하나 보았다. 프로필에는 어느 문예지를 통해 등단을 하였고, 그 문예협회의 정회원이라면서 '수필가'라는 타이틀이 올려져 있었는데, 암만 봐도 그 문예지라는 곳의 정체가 희한했다. 무엇보다 그 프로필이 재미났던 이유는 프로필의 주인이 나와는 또래 정도로 보였기 때문인데, 나는 지금껏 내 또래 중에서 그런 문예지에 글을 보내고서 '등단'을 했다는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뭐, 물론 나라는 인간은 친구 자체가 없는 사람이긴 하지만.


'등단'을 시켜준다는 이유로 상금은커녕 등단비나 행사비, 상패값, 책값 등을 요구하는 문예지가 너무 많다. 심지어 행사 뒤풀이 때 술값을 요구하는 곳도 있다고. 소위 말해 '등단 장사'를 일삼는 곳이다. 그런 곳은 대개 인생 황혼기에 접어든 어르신들이 활동을 하는데, 어르신들에겐 그런 재미라도 있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이런 내용을 글로 적었더니 누군가 나에게 노인 비하를 한다고 역정을 내어, 사과를 해주었으면 싶었는데, 그는 오해였다며 사과 없이 글만 지우고는 사라졌다.


그분이 나를 욕하며 든 논리가 재밌다. 상금을 1천만 원 이상 받는 곳을 통해 등단을 하면 작가이고, 그렇지 않으면 작가가 아닌가 물은 것이다. 그는 상금의 기준이 500만 원인지, 100만 원인지, 50만 원인지, 혹은 1만 원만 받아도 되는지 내게 물었다. 왜 받는 상금의 금액 차이로만 이야기하시는 거지. 나는 돈을 주고 등단을 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데? 재미난 건 내게 이런 말을 했던 분 역시 비슷한 문예지를 통해 글을 발표한 적이 있다는 거다. 


사실 이런 말은 신춘문예 등단자가 해도 설득력이 생길까 말까 하는 법 아닌가. 비슷한 문예지에 글을 보낸 사람이, 암만 이런 말을 해봐야 설득력을 갖기는 어렵고, 자기 합리화나 제 식구 감싸기로 밖에 보이지 않는 법이다.



2020년 디시인사이드 문학갤러리에서는 재미난 글이 하나 올라왔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퍼온 글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팩트체크를 한 것은 아니라서 문예지의 이름은 모자이크 처리 했음을 밝힌다.



글을 쓴 유저는 68곳의 문예지에 글을 보냈고, 64곳의 문예지에서 당선 통보를 받았단다. 그 64곳은 모두 등단비를 요구했으며, 글을 쓴 유저는 물론 전부 다 거절했다고 한다. 비용은 모두 제각각이지만, 당선자에게 돈을 요구하는 것은 모두 같다. 68곳의 문예지에 글을 보낸 사람이 64곳에 동시 당선 될 정도로 글솜씨가 빼어났던 걸까? 그렇다기보다는 등단 장사를 하는 문예지의 수준이라는 게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된다고 보는 게 맞을 거다.


누군가는 이런 곳에서 글을 발표하고 등단을 하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의미가 있다고 해서 가치마저도 모두 같지는 않다. 너무 물질적인 예인지는 모르겠지만 똑같은 집이라고 해도 수십억짜리 고급 아파트와 다 무너져 내릴듯한 초가집의 가치는 다르듯이. 혹은 이런 비유는 어떨까. 같은 야구 선수라고 해도, 프로 야구 선수와 실업팀의 야구 선수?


내게 문예지의 상금 차이를 운운하며, 누구는 작가이고 누구는 작가가 아닌가 하는 그 물음에는 당연히 가치가 다르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초가집에 살며, 실업팀의 야구 선수로 활동하면서 개인적인 행복감을 느끼는 것과 외부에서 바라보는 시각은 다른 것이다.


스스로 작가라는 마인드를 가지고서 글을 쓰는 것과, 외부에서 '작가'라고 불러주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문예지에 돈을 주고 '등단'을 하려는 사람들은, 작가가 되고 싶은 것인지, '작가'라는 타이틀이 갖고 싶은 것인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글 쓰는 이들이 모르는 누군가를 만나서, "아, 저는 말이죠, 작가입니다." 하였을 때, 돌아오는 질문의 십중팔구는 "어떤 책을 내셨어요?" 하는 거다. 내가 책을 내진 않았지만,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야, 나는 작가야, 하는 개인의 마음가짐과 타인이 보는 시선에는 괴리감이 있는 법이다.


등단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름 없는 문예지에 글을 보내고서, 협회비니, 책값이니, 행사비니, 등단비니 하는 돈을 주고서 "제가 등단자입니다." 한다면, 실상을 모르는 이들에겐 잠깐의 추앙을 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이 세계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겐 비웃음을 살 확률이 높다.

물론 등단 장사를 하는 문예지에 글을 보낸 사람의 글이 좋은지, 나쁜지 하는 부분은 논외로 치고.


작가가 되어야겠다 마음을 먹은 이후로 나의 목표는 '종이책 출간'이었다. 신춘문예에 단편을 보내본 적도 있지만, 등단의 목적 역시 궁극적으로는 출판에 있었다. 그리하여 나에게는 신춘문예 등단이든 출판사 투고든 어느 쪽이든 상관이 없었다. 결국 투고로 책을 내면서, 몇몇 작가 지망생들에겐 꼭 문예지 등단 만을 노릴 게 아니라 투고도 생각해 보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물론 이런 말 역시 신춘문예 등단자가 해야 설득력이 있는 법이겠지만.


어느 문청은 10년째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면서, 신춘문예의 문을 두드리기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신춘문예로 등단을 해놓고도 10년째 책을 내지 못해 마음 고생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나는 돈을 주고 문예지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과 될 때까지 두드리며 글을 쓰는 이들을 '작가'라는 공통의 이름으로 묶을 순 있어도 그 가치마저 같다고는 보지 않는다.


만약 내가 정말 사랑하는 이가 작가 지망생이라면, 싸구려 타이틀이 아닌 꾸준히 글을 쓰는 작가로 살아가길 바라는 사람이라면, 그럼에도 등단 장사를 일삼는 문예지에 글을 보낼 생각을 하고 있다면, 나는 그의 컴퓨터에서 인터넷 선을 뽑아버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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