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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사람

by 이경


김목경이 부른 곡 중에 <여의도 우먼>이라는 곡이 있다. 김목경은 김광석이 리메이크했던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의 원곡자다. 정말 좋아하는 블루스 기타리스트이자 보컬이다.


김목경 - <여의도 우먼>

여의도 우먼 날 좀 쳐다봐

여의도 우먼 우-

날 좀 봐

난 아무것 가진 것 없어 사랑하는 이 마음


나는 학창 시절을 모두 여의도에서 보내고 직장도 여의도에 있는 덕에 근 25년을 여의도에서 지내고 있다. 나도 나름 여의도 맨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느 날 페이스북에 친구 요청이 있어서 보니 초등학교 동창이다. 초등학교 6학년 올라간 첫날 영등포 영중 초등학교에서 여의도 윤중 초등학교로 전학을 왔다. 여의도로 이사 오기 전에 전학을 먼저 온 거라 한동안은 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녔다.


영등포 시장바닥에서 놀던 애들이랑 놀다가 한국의 맨해튼이라 불리는 여의도로 전학 오니 분위기가 너무 달라서 한동안 애먹었다. 영등포 애들은 코찔찔이 순수한 애들이 많았는데 여의도 애들은 엄청 깔끔하데. 여자애들은 머리도 매일 감고 좋은 향기도 나는 거 같더라. 그땐 진짜 그랬다. 영등포 애들은 동네 돌아다니는 바람 빠진 축구공 차고 다녔는데 여의도 애들은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테니스장 다니고 그랬다니깐.


어떤 애들은 내 이름을 부르는 대신 '전학 온 애'라고 불러서 그 딴에 개폼 똥폼 잡는다고 "내 이름은 전학 온 애가 아니고 이경화거든" 그랬다. 돌아온 답변은 "어 알았어 전학 온 애"였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초딩들은 악마와도 같다.


그래도 내가 워낙 착하다 보니 전학생에게도 친한 친구들이 하나둘 생기고 그랬다. 특히 페이스북 친구 요청을 해 온 친구랑은 많이 친했다. 잘 어울려 놀다가 어느 날인가 무슨 일인지 다투고 한동안 모르는 척 지내다가 둘이서 무슨 텔레파시가 통했는지 서로 사과하고 화해하던 날 나 울었잖아. 그때 친구도 울었는지는 모르겠다.


마! 내가 그렇게 마음이 심약하고! 유약하고! 나약하고! 연약하고! 마! 내가 마! 울고 마!


그 친구랑 서로 집에도 오가며 놀고 했는데 내가 여의도 미성아파트 살고 그 친구는 광장 아파트에 살았다. 바로 옆 아파트다. 친구 집에는 거실에 컴퓨터가 있었는데 그 컴퓨터를 통해 처음으로 [프린세스 메이커]라는 게임도 해봤다. 말 그대로 딸을 키우는 게임이었다. 어떤 교육과 일을 시키느냐에 따라 딸의 미래가 결정되는 게임이었다.


게임 속 키우던 애를 여름에 바캉스 보내면 애가 웃통을 까고 있거든. 거기다가 우리는 아무 이유 없이 게임 속 캐릭터 가슴 한가운데 마우스 커서를 올려놓고 막 눌러대는 거지. "받아라!! 찔러 찔러!!" 그러면서. 그땐 그게 뭐가 그렇게 웃기고 재미있었는지. 그때나 지금이나 초딩은 진짜 악마라니깐.


그렇게 초딩 마지막 학년에 만난 친구랑 일 년을 정말 재미있게 보냈지만, 서로 다른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우리는 자연스레 멀어졌다. 그때는 핸드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처럼 소셜미디어가 있던 것도 아니고. 소문이나 친구를 통해서만 그 친구 얘기를 듣고 지냈는데 친구 행보가 되게 의외였다.


공부 잘하던 애가 갑자기 춤바람이 나서 춤을 춘다더라... 라던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는 장교로 군대에 갔다더라, 해외에 나갔다더라, 금융인이 되었다더라 하는 소문을 듣다가 서른이 조금 넘어 친구는 어느새 소설가가 되어 있었다.


이야기꾼이 되어버린 초딩 동창이라니!

현실에서도 재미있는 아이였으니 글도 재미있겠지!


그렇게 소설가가 된 친구 녀석과 몇 년 전에 여의도 길바닥에서 우연히 마주쳤는데 서로 오랜만이네 인사만 하고 연락처도 주고받지 않은 채 몇 마디 나누지도 않고 헤어졌다. 서로 붙어 다닌 시간보다 떨어져 지낸 시간이 너무 길다 보니 그 간극에서 오는 분위기가 너무나 생경했던 걸까 싶더라고.


사실 그때까지도 친구가 쓴 책도 안 읽어보고 인터뷰만 찾아서 보곤 했는데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삶을 산 거 같더라. 나는 친구를 철없던 초딩의 이미지만 갖고 살았는데 십 수 년이 흘러 만난 친구는 너무나 어른 같더라 이거야.


말투도 외모도 어른이야. 막 어른 냄새나. 어우. 직업도 소설가야. 이건 뭐 빼박캔트 어른 같아.

어른. 어른. 나는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철없이 사는 거 같은데 얘 완전 어른.


그런 친구한테 친구 요청이 온 거다. 근데 그 친구라는 단어를 보는데 느낌이 묘하더라고. 친구가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이라면 우리는 십 수 년이 뭐야. 이십여 년을 연락 없이 지내던 사이인데 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까 싶더라고.


그래도 여전히 게임은 좋아하는 거 같더만. 초딩 때 게임 속에서 공주를 키우던 친구는 현실 세계에서 딸내미를 키우고 있구나. 보기 좋네. 반가워. 친구 요청에 감사. 이제 나이 먹어서 울진 않아.



*글에 등장하는 소설가 친구는 최근 개봉한 영화 <돈>의 동명 원작 소설을 쓴 장현도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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