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책을 읽다가 '유아차'라는 단어를 마주하게 되면 그 생경함에 생각하게 된다. 이 단어는 저자가 직접 쓴 단어일까. 아니면 원래는 '유모차'라고 쓴 단어를 편집자가 개입하며 바꾼 걸까. 저자와 편집자만 알 수 있는 문제이지만 둘 중 한 사람의 언어감수성이 예민한가 보다,라는 생각.
"나는 저 사람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 할 때 그 이해할 수 없음의 커다란 요인 중 하나가 서로의 언어감수성이 다를 때 일어난다고 생각하는데, 나의 경우 단어가 가지고 있는 보편성이나 어원을 따졌을 때 유아차보다는 유모차가 아직은 훨씬 편하다.
흔히들 사용하는 언어가 변하면 생각이 변한다고들 말하는데 어떤 단어들은 그 변화로 가는 장벽을 뛰어넘기가 무척이나 어렵기도 하다. 가령 국립국어원에서 암만 '바라'가 맞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바래'라고 발음하고 쓴다.
물론 사용하는 언어가 변했을 때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확연히 달라짐을 느낄 때도 있다. 나에게는 '애완'과 '반려'라는 단어가 그렇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애완견', '애완고양이' 같은 단어들을 '반려견', '반려묘'로 바꾸어 사용했고 그 결과 사람과 동물 사이의 수직적인 구조가 이제는 수평적 구조로 변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만 뚜렷하게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옛 단어들을 쓰고 싶을 때도 있다. 얼마 전 아내와 함께 산책을 하다가 고양이 한 마리를 보았다. 나는, "도둑고양이네." 했고 아내는 웃으며 쟤가 뭘 훔친 것도 아닌데 왜 도둑고양이라고 부르냐고 했다. 아 그렇지, 요즘은 도둑고양이가 아니라 길고양이라고 부르지.
나는 알고도 부러 옛 단어들을 끄집어내기도 한다. '도둑고양이'라는 단어에서 느낄 수 있는 낭만과 문학적인 감성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예민한 언어감수성을 가지고 변해가는 세상의 단어들을 포착해 가면서도 탄력적으로 단어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모차가 옳은지, 유아차가 옳은지.
도둑고양이가 옳은지, 길고양이가 옳은지.
결국은 말하고 쓰는 사람이 선택할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