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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과 의사와의 수다 타임

by 이경


세상이 각박하다. 사람들은 타인과의 대화를 줄이려고 한다. 택시 안에서 택시 기사가 하는 정치 이야기를 싫어하고, 병원에서 의사가 사생활을 물으면 싫어한다. 나 역시 다르진 않다. 불특정 한 누군가와 말 섞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단, 상대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털어놓는다면 그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동네 내과에 통풍약을 처방받으러 갔다. 목표는 하나였다. 재빨리 처방받고 쏜살같이 나오기. 결과는 실패다. 의사 선생님과의 수다 타임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통풍약을 먹기 시작하면서부터 줄곧 동네 내과에서 약을 받는다. 혈압약은 대학병원에서 처방받는다. 얼마 전 대학병원에서 혈압약을 처방받으며 이미 혈액검사는 받은 상태.


동네 내과 의사 선생님을 찾아뵙고는,
"제가 얼마 전에 피검사를 했는데요. 별 문제는 없더라고요."


"그래요. 요산 수치(통풍 검사할 때 측정하고 7.0 넘어가면 통풍이다)는 얼마 나왔어요?"


"네. 7.7 정도 나왔습니다."


"7.7이면 높지. 뭐 별 문제없어. 맥주는 안 먹죠? 맥주랑, 등 푸른 생선이랑, 내장이랑 암튼 그런 거는 안 좋다고."


"네네."


약 처방을 받기 위한 가벼운 수다가 오가고 이제 처방전만 나오면 될 것 같은데, 그러면 끝날 것 같은데. 의사 선생님은 병원에 환자가 없어서 적적한지 자꾸만 말을 거신다.


"요즘 뭐 재미난 일 없어요?"


"네네. 뭐 똑같죠. 특별히 재미난 일은 없네요."


"재미난 일 있으면 나 좀 떼어달라고 할라 그랬지. 요즘에는 세상이 좀 그런 거 같아. 월드컵을 언제 했지?"


"네네. 4년마다 짝수년에 하니까... 작년에 했네요."


"옛날엔 월드컵 할 때 막 길거리에서 응원하고 그랬잖아. 그런데 요즘에는 모바일로 스코어 같은 거 다 나오고 하니까 뭐, 재미가 없어. 뭐 관심 가는 일은 없어요?"


"아, 네네 저는 취미로 글 쓰는 거 좋아하거든요."


"아. 그런 취미는 좋지."


오랜만에 의사 선생님을 보았더니 얼굴에 살도 많이 붙으셨고, 노안이 온 건지 전과는 달리 색이 들어간 안경을 쓰고 있었다. 안부차 나는 한마디를 더 건넸다.


"선생님. 그런데 예전보다 살이 좀 찌신 거 같네요."


"아, 내가 얼마 전에 학회에 갔다 왔거든. 중국에 갔다 왔다고. 학회 갔더니 내가 나이가 제일 많아. 중국에서 밥 먹으면 동그란 테이블 막 돌아가잖아. 내가 제일 나이가 많으니까 박사님 먼저 드시죠 한다고. 중국 음식은 왜 그렇게 맛있는지 몰라. 내가 먹는 걸 좋아한다 말이야. 중국 가서 하루에 이 킬로씩 찌는 거야. 육 킬로 쪄서 왔는데 살이 안 빠지네."


"그래도 살이 좀 붙으니까 보기 좋으신데요."


의사 선생님은 살이 붙어 보기 좋다는 이야기가 싫지 않은지 씨익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내가 운동을 좋아한다고. 얼마 전에 후배놈들이 불러서 북한산에 갔다 왔어. 나는 그냥 둘레길 도려나보다 하고 반팔 티 입고 지팡이도 안 갖고 갔지. 아, 근데 이 새끼 들은 프로 차림을 하고 온 거야. 와이프들은 둘레길로 돌리고 우리는 높은 봉을 탔다고."


의사 선생님은 컴퓨터 옆에 있던 휴대폰을 집어 들며 그 날의 북한상 등정 사진을 하나하나 보여주셨다.

나는 사진을 보며,

"아이고, 가벼운 마음으로 가셨다가 고생하셨겠네요."


"그렇지. 내가 아침마다 수영을 해. 수영 나가면 서른 번 왔다 갔다 하거든. 그런데 저번에 산에 갔다 와서 탈이 난 거야. 요 며칠 수영을 못했어."


"아, 선생님 운동을 좋아하시나 보네요."


"운동 좋아하지."


"선생님 실례지만 아직 일흔은 안 되신 거죠?"


"아이 일흔은 무슨. 이제 68. 아직 괜찮지."


"선생님 골프는 안 치세요?"


"골프? 골프는 이제 은퇴했지. 골프 해요? 내가 여기 병원 개업 전에 하와이에서 6년 살았어. 거기 가면 친구가 둘 밖에 없어. 거기서 뭐하겠어. 주말마다 골프만 치는 거야. 나는 한국 사람 싫어하거든. 한국 사람 관섭이 심하잖아. 누가 한국 사람이세요? 물으면 YES 하고 말 안 해. 자꾸 한국말로 물으면 못 알아듣는 척한다고. 한국 사람들은 그래. 집은 렌트예요? 산 거예요? 그런 거 막 물어본다고. 나는 미국 사람들하고 조인해서 골프 치고 그랬지. 저번에 마스터즈 타이거 우즈 시합 봤어요?"


"네네 봤습니다."


"나는 보는데 눈물 나겠더라고. 초반에 타이거 성적이 잘 나오는데 저 새끼 저거 저러다가 탈 나는 거 아니야? 싶더라고. 옛날에 어니 엘스라고 있어. 드라이버 치면 막 300야드씩 날리는 장타자였다고. 그런데 타이거는 아니지. 옛날에 하와이에 타이거가 시합 오면 친구 놈이 막 구경 가자고 했단 말이야.

내가 서른 좀 넘어서 골프 쳤는데, 형들은 말렸다고. 돈이 좀 들어가. 우리 형은 유도를 했으니까 골프 같은 건 안 맞아. 나는 골프 쳐도 꼭 내기를 한다고. 그러면 퍼팅 크기만큼 컨시드 주고 하잖아. 난 그렇게는 안 한다. 오리지날 아니면 안 한다. 대신 내가 밥은 사줄 수 있다. 이러면 같이 치는 새끼들이 아이유 뭐 그렇게 까지 치냐 그러면서 친다고. 그러면 이 놈들이 버디 찬스에서 보기하고 그래. 나는 그런 거 좋아하거든. 포카. 도박. 이런 게 재밌어.

골프 칠 때 팁을 줄까? 필드 나가면 순서 생각을 하지 말라고. 원투쓰리 이런 거 필요 없어. 그냥 한 동작으로.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쳐야 한다고.

요즘에는 골프공을 기계가 다 올려주잖아. 옛날에는 여성 도우미가 있어. 공을 치면 공을 하나씩 올려준다고. 그런 거 모르죠?"


"네네. 몰랐습니다."


골프는 안 치시냐는 가벼운 질문 하나에 언제 적일지도 모르겠는 골프 도우미 이야기까지 나온다.


"내가 아는 선생 중에 김관식 선생이라고 있어. 이 사람은 운동 천재야. 보자 이분이 45년생이니까 지금 칠십넷 뭐 그렇다고. 이 사람이 육십 넘어서 마라톤을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완주를 수십 번 했어. 이 사람이 골프를 처음 쳤는데 몇 개 쳤는지 알아? 82개인가 쳤다고."


"아, 그분은 젊어서 하셨으면 프로 하셨어도 됐겠네요."


"그렇지. 그런데 이 사람 혈압이 낮아. 심장이 안 좋지. 우리는 이제 마라톤 그만 하라고 말린다고. 마라톤 계속하면 이 사람 가슴에 페이스 메이커 달아야 해. 페이스 메이커를 달려면 혈압이 어느 정도 높아야 한단 말이야. 그렇게 말리는데도 얼마 전에 동아 마라톤을 갔다 왔더라고. 스쿼트라고 있잖아. 앉았다 일어나는 거."


스쿼트를 설명하면서 예순여덟의 의사 선생님은 직접 앉았다 일어나는 스쿼트 자세를 선보이기까지 했다.


"김관식 선생이 이걸 천이백 번 한다고. 우리 같은 사람은 백 번도 못할걸?"


그때 내 핸드폰이 울렸다. 의사 선생님의 수다가 멈춘 상황. 나는 왠지 전화를 받으면 의사 선생님이 실망할 거 같아 조용히 걸려오는 전화에 문자를 보냈다.


<회의 중입니다. 잠시 후 연락드리겠습니다.>


그 후에도 의사 선생님은 나로서는 얼굴도 알지 못하는 김관식 선생의 일화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병원에 환자가 없어서였을까. 의사 선생님은 나를 붙잡고는 '너 잘 걸렸다.' 하는 심정인지 한참을 이야기했다.

빨리 처방전만 받고 나오려고 했는데 결과적으로 의사 선생님과 30분을 떠들었다. 어쩐지 그 수다가 싫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이 68에서 나온 그 드립들이 얼마나 대단한가.

재미난 일 있으면 떼어달라고 하려했다는 드립.

일흔은 무슨 일흔이냐며 이제 68이라는 드립.
한국 사람이에요? 라는 질문에 yes라고 대답했다는 드립.
타이거 우즈 탈 나는 거 아닌지 걱정하면서도 우승 후에는 눈물 날 것 같다던 그 감성과 스쿼트를 직접 선보이는 그 열성까지.


암튼 통풍약은 두 달치를 처방받았다.

선생님, 평소에는 분명 석 달치 처방해주셨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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