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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게 우리 춤을 춰

너와 내가 있었던 그때

by 이경
윤중 & 김사월 - <땐뽀걸즈>



윤중 & 김사월 <땐뽀걸즈> 中


세상이 막막하기만 해도
지금은 그런 고민하지 마
즐겁게 우리 춤을 춰

가끔 넌 그때 기억하니
함께하며 정든 우릴 말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너와 내가 있었던 그때





부지런한 인스타그램은 종종 "너 작년 오늘 이런 사진 올렸더라" 하고 알려준다. 작년 이맘때 나는 윤중&김사월의 <땐뽀걸즈> 싱글 커버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이 곡을 듣고 처음으로 김사월의 목소리가 괜찮다고 느꼈다. 작년 처음 듣고 지금껏 참 많이 들은 곡이다.


영화 [땐뽀걸즈]는 아직 못 봤지만, 동명의 이 사운드트랙을 듣고 있으면 학창 시절이 떠오른다. 고교시절 CA라고 부르는 특별활동에서 도서부로 활동했다. 특별히 책을 많이 보던 것도, 책을 좋아한 것도 아니었지만 도서부가 왠지 제일 만만해 보였다.


2학년 때는 3학년 선배들의 지도 아래 학교 축제를 준비했다. 학교 축제 때 도서부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그저 몇 권의 책을 전시하고, 그 책에 대한 설명을 폼보드에 보기 좋게 붙이는 게 다다. 책만 전시해서는 다른 부서와 경쟁력이 없을 것 같아 우리는 책과 CD를 전시했다.


낮에 축제를 준비하다가 시간이 모자라면 우리들은 밤늦게 부실에 모여 축제 준비를 해야만 했다. 밤의 학교에는 귀신이라도 나오는 걸까. 축제 준비를 위해 늦은 밤 학교 앞에 부원들이 모였을 때, 정문이 잠겨있었다. 문이 잠겼다고 축제 준비를 미룰 수는 없다.


우리는 하나, 둘 학교 담을 넘어 CA 부실로 들어갔다. <땐뽀걸즈>를 듣고 있으면 그 늦은 밤 학교 담을 넘을 때 우릴 비추던 가로등 불빛이 생각나는 것이다. 그 환하고 노랗던 가로등 불빛.



한편 축제 팜플렛에 들어갈 내용을 정리하고 스폰서를 구해야만 했다. 팜플렛 여백에 학교 주변 문방구 등의 가게를 광고하고 광고비를 받는 계획을 세웠다. 우리들은 학교 주변 상인들을 만나 가게를 홍보해 줄 테니 도와 달라고 읍소했다. 상인들은 난색을 표했다. 선배 말로는 예년까진 이런 방식이 통했는데, IMF와 불경기 등으로 광고를 잡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모두가 고민에 빠져있을 때 도서부원 친구 하나가 이런 제안을 해왔다. "우리 문방구 같은데 말고, 어디 안마시술소 같은 데 가서 광고 실으라고 해볼까?"

그때 내 대답은 아마도 "야 이 미친 새끼야" 였던 거 같다. 친구의 얼척없는 제안에 우리들은 머저리마냥 낄낄거리며 웃었다. 끝내 축제 날까지 스폰서를 구하지는 못했지만, 늦은 밤 친구들과 모여 축제를 준비하는 시간은 즐거웠다.


대망의 학교 축제 날. 우리 같이 얌전하고 시시한 도서부는 학교 축제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선생님의 매타작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온갖 색으로 머리를 물들인 밴드부 정도 되어야 주변 여고생의 환심을 살 수 있다. 도서 전시는 동년의 여고생보다 학부모들에게 더 인기가 있었다. 그럼에도 <땐뽀걸즈>를 듣고 있으면 책 안 보던 꼴통들이 뭐 좀 해보려고 아등바등하던 즐거운 시간들이 떠오른다.


그때 우리는 막혀있는 세상 너머 함께 담을 넘고 있었다. 즐겁게 춤을 추고 있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시간에 너와 내가 있었다.


-참고로 행사날 내가 전시한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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