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확률 속으로

by 이경


확률 - 일정한 조건 아래에서 어떤 사건이나 사상(事象)이 일어날 가능성의 정도. 또는 그런 수치.

(네이버 국어사전)



초등학생 때 산수는 그럭저럭 했다. 살면서 돈 계산은 할 줄 알아야 하니까. 밥값 내고 거스름돈 얼마 받아야 하는지는 알아야 하니까. 초딩 2학년 때 구구단을 못 외워 방과 후에도 교실에 남아있긴 했지만, 그래도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는 할 줄 안다.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를 어려운 말로 사칙연산이라고 하던가.


숫자를 가지고 공부하던 시간이 산수에서 수학으로 바뀌면서 나는 수포자가 됐다. 정확히 말하자면 수학 책에 영어 스펠링이 보이는 순간, 수학에 영문이 웬 말인가 하며 배신감을 느낀 것이다. 싸인, 코사인, 탄젠트 같은 단어가 보이면서 더 이상 내게는 숫자 놀음이 아닌 게 되어버린 것이다. 밥값 계산할 때 싸인, 코사인은 필요 없을 것 같아 그 길로 두꺼운 <수학의 정석>은 그저 책상 위 베개로만 사용됐다. <수학의 정석>이 내겐 베개의 정석이 된 셈이다.


그럼에도 수학 과목에서 좋아했던 시간은 있다. 확률이다. 백번 중에 한 번은 1퍼센트요, 천 번 중에 한 번은 0.1 퍼센트요, 하는 시간만큼은 재미있었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초딩 시절 16비트 오락기로 야구나 축구 게임을 즐겨했다. 지금의 야구게임이라 함은 고해상도 그래픽에 실제 팀과 선수가 등장하지만, 16비트의 오락기에서는 가상의 팀과 모두 똑같은 모습을 한 선수들이 등장했다.


나는 야구 게임을 하면서 똑같은 모습을 한 게임 속 캐릭터에 이름을 부여하고는 투수의 방어율과 타자의 타율을 구했다. 1번 타자가 3타수 1안타를 치면 종이 위에 1번 타자 3할 3푼 3리라고 적었고, 2번 타자가 4타수 1안타를 치면 2할 5푼이라고 적었다. 확률을 좋아했던 건지, 야구를 좋아했던 건지는 나조차도 답을 내릴 수 없지만, 가능성의 숫자들을 적어나가는 게 좋았다.


그런 취미 생활은 중학생이 되어서도 여전하여, 나는 어쩌면 야구장의 기록원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야구 선수도 아니고, 야구 기록원이라니. 그 꿈 참 소박하기도 하지. 시간이 흘러 야구 선수도 야구 기록원도 되지 못한 나는 여전히 확률 속으로 들어와 산다.


로또 1등의 확률은 팔백만 분의 일이라던가. 가능성이 더럽게도 낮군.

담배를 태우면 폐암과 심장병에 걸릴 확률이 올라간다고? 젠장.

오늘 비가 올 확률은 30%라니. 참 애매하기도 하다.

뭐, 이런 식의 소소한 일상 속 확률을 가늠해보는 것이다.




최근 2년간 내가 빠져 있던 확률은 출판사에 글을 보내고, 그 글이 책으로 나올 수 있는 수치였다. 내 돈 들여 책을 내는 자비출판이나 독립출판이 아닌 투고를 통한 기획출판의 확률을 여기저기에서 알아보았다. 누군가는 1%라고 했고, 누군가는 0.1%라고 했다.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에서는 900건 중 하나. 0.1111111%를 얘기했다. 한 편집자는 인터뷰를 통해 편집자 인생 7년간 단 한건도 투고 원고로 책을 낸 경험이 없다고도 했다.


로또 1등만큼의 극악한 확률은 아니지만, 투고 원고가 책으로 나올 확률이 낮은 것은 분명해 보였다. 2018년 1월 처음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면서 나는 '원고 투고'라는 제목의 엑셀 파일을 만들었다. 그 파일 안에는 순번과 투고 날짜, 출판사명과 메일 계정, 답변의 유무, 답변의 결과를 기록했다.


투고하는 출판사의 숫자가 늘어갈수록 내 원고의 출간 확률은 점점 낮아졌다. 아니, 이룬 바가 없으니 그 확률은 처음부터 줄곧 0%라고 말하는 것이 옳은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말한 1%의 가능성을 믿고 백번을 투고하면 이루어질까, 아님 또 다른 누군가의 말처럼 천 번을 투고하면 이루어질까.


지독히도 낮은 확률 속으로 들어와 바보처럼 매달렸던 이유는 확률에 담긴 단어를 보았기 때문이다. 나를 낮은 확률에 매달리게 했던 그 단어는 '가능성'이다. '가능성'이라는 단어에는 받침이 없거나 이응만 붙어있어 입말이나 생김새 모두가 부드럽고 매끄럽다. 내게 '가능성'은 어쩐지 옆에 붙어 따뜻하게 매만져주고 싶은 단어였다. '가능성'이라는 단어는 그렇게 나를 0%에 가까운 확률 속에서 빠져나올 수 없도록 만들었다.



처음 출판사에 투고를 하고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을 보냈다.


다시 사전을 연다.

이번에는 확률이 아닌 '가능성'의 뜻을 알아본다.

가능성의 뜻은 "앞으로 실현될 수 있는 성질이나 정도"로 나와있다.

그리고는 '실현'의 뜻을 알아본다.

실현의 뜻은 "꿈, 기대 따위를 실제로 이룸"이라고 나와있다.


'확률'과 '가능성'과 '실현'은 이처럼 붙어지내고 있었구나.

이 단어들의 연결이 이제야 보인다. 이제는 보인다.


단어들의 연결에 눈이 밝아졌다.

단어들의 말뜻에 눈이 흐려진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신발과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