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초등학교 6학년 아들 1호는 아침 일찍부터 친구 셋과 함께 롯데월드로 떠났다. 아들 1호는 혼자서 지하철을 탈 줄 모르는 녀석인데 같이 간 친구 두어 명이 길 안내를 했다고. 그 나이엔 그렇지. 좀 일찍 길눈에 밝아지는 아이들과 그 아이들을 따라가는 아이들. 여하튼, 잘 가라 이놈아 하고서 아들을 보내놓고 와이팡이랑 아들 2호만 남은 상황.
무얼 해야 할까, 하다가 네이버에 '서울 축제'를 쳐보니 성북세계음식축제가 열린다. 이거 원래 옛날에 이태원에서 하던 걸 성북으로 옮겨서 하는 건가. 자세한 건 모르겠고, 얼마 전 컨버스에서 산, 가슴팍에 SEOUL이라고 새겨진 티샤스를 입고 나가보기로 한다. 서울 돌아다닐 때 서울이라고 써있는 티샤스를 입고 다니면 진짜 여행자의 기분이 나고 좋습니다...
지하철을 한번 갈아타고 한성대 입구역에서 내려 세계음식축제라는 곳을 가보니, 덥고 사람이 많았다. 주로 동남아시아 음식과 남미 쪽 튀김이 좀 있었고... 구라파는 폴란드 정도가 보였다. 세계음식축제라고 하기엔 뭔가 좀 좁은 세계의 아이덴티티가 느껴지는... 아, 구라파 중에서는 불가리아도 있었다. 그 TV 자주 나오는 '미카엘' 셰프도 왔던데 어쩐지 명성에 비해서는 부스에 사람이 많이 없었다.
어쨌든 왔으니 뭔가 먹어보자 해서 그나마 줄이 좀 짧은 곳에서 이것저것 먹어보았다. 파키스탄 양꼬치, 파키스탄 닭고기 덮밥 같은 거 먹어보고, 페루에서 왔다는 음료수 '치차모라다'와 '피카로네스'라는 이름의 페루 도나쓰를 먹어보았다. 그럭저럭 먹을만했는데, 특히 피카로네스가 맛있었다. 축제에서 인상적이었던 건 재활용이 가능한 플라스틱 컵과 그릇을 주어서 먹고는 바로 분리수거를 할 수 있게 해 주었던 건데 1회 용품을 없애기에 좋은 시도로 보였다.
햇빛이 너무 뜨겁고 사람이 많아서 결국 장소를 옮겨 걸었다. 성북동에 온 김에 몇 년 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길상사를 검색해 보니 축제 장소에서 1킬로 정도 거리. 이때 아니면 또 언제 와볼까 싶어서 걸었다. 길상사에 올라가는 길에 고급 주택도 보이고 성북동성당도 보이고 해서 눈이 즐거웠다.
한글로 쓰인 길상사 현판과 함께 하얀색 연등이 보이기 시작. 길상사는 정말 좋았다. 길상사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법정과 백석일 텐데, 법정 스님 진영각엔 스님이 살아생전 출간했던 책들과 입었던 승복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온통 누더기로 가득한 승복을 보니, 마음이 경건해지고도 하고. 이런 경건한 마음과는 또 별개로 길상사가 되기 전 대원각 시절을 상상하니 이야, 이런 곳에서 고기 안주에 술 마시면 진짜 술 마실 맛 났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길상사 한쪽에는 성모마리아상을 닮았다는 관음보살상이 있었는데, 이 보살상의 표정이 정말 좋았다. 어쩐지 계속 보고 있으면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은 느낌. 길상사 한쪽에서는 북카페도 운영하고 있어서 들어가서 황매실차와 오미자차를 마셨다. 차 한 잔에 2900원 정도였나. 가격도 너무 착하네.
길상사에서 나와서는 주변에 뭔가 하나를 더 보자 싶었다. 서울티샤스까지 꺼내 입은 서울 여행 아닌가. 근처에 보니 '가구 박물관'이 있는데 일요일은 휴무. 길상사에서 조금 더 올라가니 '우리옛돌박물관'이란 곳이 있다. 우리 옛돌이란 무엇인가. 뭔지는 몰라도 일단은 가보자. 또 걸었다. 그야말로 옛돌을 모아놓은 박물관이었다. 성인 3천 원, 초딩 1천 원.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그 이전 삼국시대 돌들도 있었던가? 아무튼 문인석, 남근석, 동자석 등 이런저런 돌덩어리를 모아놓은 (야외) 박물관이었는데 생각보다 정말 좋았다. 규모가 꽤 큰 조선시대 미륵불도 있었고, 승승장구의 길이라고 해서 시험 합격에 용하다는 돌들도 있었다. 사람모양을 닮은 돌들을 모아놓은 것이라 어쩐지 해 떨어지고서 본다면 좀 으스스할 것 같기도 하고.
길상사도 그렇고, 옛돌박물관도 그렇고 대지가 높은 곳에 있어서인지 저 멀리 롯데타워가 보일 정도로 서울 전경이 훤했다. 나처럼 한 번도 안 가보신 분들은 길상사 + 옛돌박물관 같이 둘러보시는 걸 추천추천.
옛돌박물관에서는 마을버스를 타고 내려왔다. 다시 세계음식축제장에 내렸더니, 날씨는 좀 괜찮아졌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많았다. 그래서 세계음식이고 뭐고 간에 시원~~~한 국수나 하나 말아먹자 싶어 구포국수에 들렀다. 회사 근처에 몇 년 전부터 생긴 구포국수에도 한 번도 안 가봤는데, 성북동까지 와서 구포국수에 들렀다. 비빔국수 하나와, 해물파전 하나를 시켰는데 도저히 이 해물파전을 마실 것 없이 먹을 자신이 없어서 결국 막걸리를 하나 시켰다.
나는 1년에 한 서너 차례 술을 마시는데... (진짜임...) 이렇게 자발적으로 술을 시켜 먹는 일은 굉장히 드문 일로서... 여하튼 지평 생막걸리를 한통 때렸더니 얼굴이 시뻘게졌다. 아, 막걸리가 존맛탱이더라구... 근데 구포국수 아줌니가 음식 서빙할 때부터 계속 죄송하다는 거야. 알고 보니까 해물파전이 좀 늦게 나왔다는 거.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파전 굽다가 좀 늦을 수도 있지 하고서 볼멘소리 없이 먹고 마셨더니 아줌마가 고마웠나 봐. 계산할 때 나보고 뭐라 그러셨는지 아십니까들...
아무튼 구포국수에서 카드를 긁고 얼굴이 벌게져가지고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길에 카드 영수증을 봤더니 막거리 하나 값을 안 받으셨네. 보자보자, 국수가 8천 원이요, 해물파전이 2만 원이요, 막걸리가 4천원이니까능 도합 32천 원이 긁혀야 분명한데, 어째서인지 아주머니가 28,000원 계산하신 거.
아줌니가 막걸리를 서비스로 주신 건지, 혹은 실수로 빼놓고 계산하신 건지는... 몰라몰라, 내가 당장에 알 도리도 없고... 막걸리 하나 값이 미스테리에 빠졌다 이겁니다.
세계음식축제-길상사-옛돌박물관 들르니 17,000보 정도 찍히더라. 성북동 약간 사람 사는 동네 느낌 나고 좋아보이던뎅, 담에 또 한 번 가보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