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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 Jun 12. 2024

한 꼭지 읽고 말하기



어제는 주문한 책 세 권을 받았다.

왕딩궈의 <가까이, 그녀>, 김미옥의 <미오기傳>, 김유태의 <나쁜 책>


<가까이, 그녀>는 한 페이지도 들춰보지 않았고 <미오기傳>과 <나쁜 책>은 프롤로그와 한 꼭지씩만 읽어보았다.


<미오기傳> 첫 꼭지 글 재밌었다.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개인적인 슬픔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글이었다. 첫 꼭지에서 작가의 성격과 기질, 유년의 일과 가족관계 등을 어렴풋하게나마 엿볼 수 있어서 마치 "나 이런 사람이고 이렇게 살았고 이런 글 보여줄 거야" 하고서 소개를 하는 듯했다.


유년 시절 아버지가 하시던 공장이 유지되었더라면 훌륭한 용접공이 됐을 수도 있었겠구나 싶으면서 이 사람 여장부네 하는 느낌을 받았다. 페북에서 작가의 글을 읽을 때는 그저 음악 좋아하고 책만 좋아하는 분인 줄 알았는데, 첫 꼭지를 읽고서야 용접 마스크를 쓰고 용접을 하며 남편에게 "저리가. 눈 버리니까." 내뱉는 작가를 상상하게 되었다. 저리가, 눈 버리니까는 어쩐지 무심한 듯하면서 터프한 게 완전 츤데레 멘트 아닌가. 용접하는 여자라니, 개멋있네...


첫 꼭지 보면서 좋았던 다른 하나는 '유모차'를 '유모차'라고 쓴 점이었다. (책에서 김미옥은 유모차를 해체하고 재조립한다.) 요즘엔 책을 읽을 때 가끔 '유아차'라는 단어가 보이면, 이건 작가가 고른 단어일까 혹은 편집자가 권한 단어일까 혼자서 생각해 보게 된다. 만약 내가 원고에서 '유모'라고 쓴 걸 요즘은 시대가 이러니 저러니 하면서 '유아차'라고 바꾸길 권하는 편집자를 만난다면 나는 거절할 것 같다. 그건 내가 쓰는 단어가 아니니까. <미오기傳> 첫 꼭지에서 '유모차'라는 단어를 보면서 이 책은 편집자의 개입이 과하지 않고, 작가의 언어로 쓰인 책이겠다 싶어서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더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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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태의 <나쁜 책>은 새빨간 색의 표지로 금서를 소개하는 책이다. 프롤로그와 넬리 아르캉의 <창녀>를 소개하는 꼭지를 읽어보았다. 넬리 아르캉은 5년 동안 매춘을 한 경험으로 자전적인 소설 <창녀>를 썼다고. 꼭지를 읽어보고서는 <창녀>를 읽어보고 싶어 찾아보았더니, 문학동네에서 나온 책이 절판 상태였다. 절판이라는 단어는 슬퍼요. 책을 쓴 넬리 아르캉은 2009년 34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고, 2016년엔 그의 이야기를 다룬 <넬리>라는 영화도 만들어졌다는데 나는 <나쁜 책>을 통해서 알게 된 작가다.


<나쁜 책>은 프롤로그도 좋았다. 문화부 기자인 김유태의 신문사에는 매주 100권 넘게, 한 달로 치면 500권, 연간 6,000권이 넘는 책이 도착한다고. (출판사에선 신간이 나오면 홍보용으로 언론사 등에 책을 뿌린다)

김유태가 언론사 릴리스용으로 받은 책봉투를 뜯으며 받는 감정은 셀렘이나 환희가 아닌 한숨이거나 낙담이란다. 매주 100권이 넘는 책 중 지면에 소개되는 책은 10권 정도이며 나머지는 버려지는데, 저자는 이 버려지는 책을 '안전한' 책으로 비유한다. 오늘날 출판계는 안전한 책으로 가득하다고.


가끔 선무당 같은 글쓰기 강사나 글쓰기를 종용하는 사람들을 보면 좋은 사람이 좋은 글을 쓴다는 따위의 개소리를 해대는데, 당연하게도 모두에게 좋은 사람과 모두에게 좋은 글 같은 건 있을 수가 없다. 그들이 말하는 좋은 사람과 좋은 글이 책이라는 결과물로 만들어진다면 그건 십중팔구 김유태가 말하는 '안전한 책'에 지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다. <나쁜 책>은 겨우 한 꼭지 읽어보았을 뿐이지만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시대의 문제작들을 다루었다. 좋은 사람, 좋은 글 같은 드립을 치는 헛소리꾼들에게 선물하고픈 책이다.


아, <나쁜 책> 프롤로그에서 인상적이었던 거 하나 더. 김유태는 현존하는 금서를 검색하기 위한 수단으로 GPT-4를 썼으며, 직업인의 양심을 걸고 인공지능으로 책 내용을 요악하거나 베껴 쓰는 얄팍한 부정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나는 이 고백이 감동스러웠다. 요즘 몇몇 글쓰기 강사들은 인공지능을 이용한 에세이 쓰기 같은 수업도 하던데. 나는 그런 커리큘럼을 보면서 왜 저런 머저리 같은 짓을 가르칠까 생각했으니까.

<나쁜 책>도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거 같다. 더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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