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가까운 사람을 처음 만난 사람처럼 대할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예전 아버지와 10년 넘게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않았다.
뭐 싸운 건 아니었다. 그냥 대화를 안하다보니 멀어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가 멀어지게 했다.
그래서 명절에도 최소한의 인사만 하고, 전화도 어머니하고만 했다.
아버지와는 같은 집에 있어도 다른 공간에 사는 것처럼 지냈다.
딸아이와도 비슷했다.
"밥 먹어라." "공부해라." "조심해라."
내가 하는 말은 늘 그것뿐이었다.
딸아이는 "네" 하고 대답하지만, 그 "네"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난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함부로 대했다.
가족이니까 괜찮을 거라고, 이해해줄 거라고 착각했다.
그런데 이 나이가 되니 깨달았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가장 무례했다는 것을.
힘들 땐 안 보는 것도 방법이라고 생각했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힘들 때, 나는 의도적으로 거리를 뒀다.
명절도 가끔 핑계 대고 빠지고, 전화도 하지 않았다.
처음엔 죄책감이 들었다. 불효자 같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억지로 만나서 상처 주고받는 것보다, 차라리 안 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감정이 격해 있을 때 만나면 또 싸우고, 또 후회한다.
그럴 바엔 시간을 두고 마음을 가라앉히는 게 서로에게 더 나을거라고.
그러다 깨달은 게 있다.
가까운 사람을 처음 본 사람처럼 대하면, 관계가 달라진다.
처음 만난 사람한테는 함부로 하지 않는다. 예의를 갖춘다. 말을 조심한다.
그리고, 처음 만난 사람한테는 감정을 소모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카페 직원이 주문을 잘못 받아도 "괜찮아요" 하고 넘어간다.
택시 기사가 길을 돌아가도 "그럴 수 있죠" 하고 받아들인다.
처음 만난 사람이 약속 시간에 늦어도 "천천히 오세요" 한다.
왜? 깊게 생각하지 않으니까. 감정을 투자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편하다.
그런데 가족한테는?
아내가 내 말을 안 들으면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딸아이가 내 충고를 무시하면 서운했다.
"왜 내 마음을 몰라줘?"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많은 걸 기대했고, 더 많은 감정을 쏟았다.
그게 문제였다.
기대가 크니까 실망도 컸다.
감정을 많이 투자하니까 상처도 컸다.
깊게 생각하고 밤잠도 설쳤다.
"왜 아버지는 저렇게밖에 못 하실까?"
"왜 딸아이는 내 말을 이해 못 할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게 나를 지치게 했다.
그래서 나는 방법을 바꿨다.
가족을 처음 만난 사람처럼 대하되, 감정 소모는 하지 않기로 했다.
아버지와 산책할 때도 예의 바르게 대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상처받지 않았다.
"아버지는 원래 저런 분이시지" 하고 받아들였다.
마치 처음 만난 어르신이 뭔가 이상한 말을 해도 "그럴 수도 있죠" 하고 넘기듯이.
딸아이한테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하루 어땠어?" 물어봤다. 대답이 성의 없어도 괜찮았다.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였다.
마치 처음 만난 사람이 대충 대답해도 "네, 그러시군요" 하고 넘기듯이.
기대를 내려놓으니 실망도 없었다.
깊게 생각하지 않으니 속이 편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예의 바르게 대하지만, 그 사람 때문에 밤새 고민하지는 않는다.
카페 직원이 불친절해도 집에 가서까지 생각하지 않는다.
택시 기사가 무뚝뚝해도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다.
그게 편하다.
그래서 나는 가족에게도 그렇게 대하기 시작했다.
정중하게, 예의 바르게, 하지만 감정은 소모하지 않기.
밤새 생각하지 않기. 속상해하지 않기.
그냥 받아들이기. 그게 그 사람이니까.
신기하게도 그렇게 대하니 관계가 나아졌다.
감정 소모를 안 하니까 덜 지쳤다.
덜 지치니까 더 자주 만날 수 있었다.
더 자주 만나니까 관계가 자연스러워졌다.
이상한 말을 해도 "아, 그러세요?" 하고 넘겼다.
퉁명스럽게 대답해도 "그래" 하고 받아들였다.
처음 만난 사람처럼 예의 바르게, 하지만 감정은 투자하지 않기.
그게 나를 살렸다.
중년을 살면서 배운 것들.
하나, 가까운 사람을 처음 만난 사람처럼 대하라.
예의 바르게, 정중하게, 하지만 감정은 소모하지 마라.
둘, 기대를 내려놓아라.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다. 그게 편하다.
셋, 깊게 생각하지 마라.
처음 만난 사람이 이상한 말을 해도 밤새 고민하지 않는다. 가족도 마찬가지다.
넷, 힘들 땐 거리를 둬라.
억지로 만나서 감정 소모하는 것보다, 시간을 두는 게 낫다.
'아, 이렇게 사는 게 편하구나.'
가장 가까운 사람을 처음 만난 사람처럼 대하라.
예의는 갖추되, 감정은 소모하지 마라.
그게 나를 지키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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