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나의 투박한 세계로 건너온 대가

서로의 우주를 여행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허문 우리들의 현재진행형 기록

by 까칠한 한량

지난 이야기들이 우리의 과거를 반추하는 기억의 편린이었다면,

이전 글과 오늘 내가 꺼내어 놓는 이야기는 조금 다른 결을 가진다.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명멸하며 이어지는 우리의 현재,

즉 그녀가 나를 위해 그리고 내가 그녀를 위해 조금씩 변해가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사랑에 관한 기록이다.


사실 우리는 출발선부터가 아주 달랐던 사람들이다.

그녀는 이른바 아주 아주 부잣집 딸로 태어나 평생 부족함 없는 풍요 속에서 자랐다.

비록 지금은 가세가 기울었다고는 하나 부자는 망해도 삼 대를 간다는 말처럼,

그녀의 몸에 배어 있는 기품과 정갈함은 감출 수 없는 것이었다.


평생 누구에게 아쉬운 소리 한번 해본 적 없고,

거친 환경에 자신을 내던져본 적 없는 사람.

그것이 그녀라는 세계를 정의하는 가장 핵심적인 문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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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녀에게 나와 함께하는 일상은 매 순간이 낯선 세계와의 조우였다.


나에게 재래시장은 삶의 활기가 넘치는 놀이터이자 여행의 첫 번째 코스였지만,

그녀에게 그곳은 그저 텔레비전에나 나오는 생경한 관광지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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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장터 골목을 누비며 허름한 식당에 앉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밥 한 그릇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나의 여행 방식은 그녀에게 커다란 문화 충격이었으리라.


특히 그녀가 처음 낡은 모텔 앞에 섰을 때의 그 당혹스러운 표정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하룻밤 숙소비는 8만 원 내외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나와 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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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모텔이라는 공간은 거부감과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혹시나 몰래카메라가 있지는 않을까 걱정하며 불을 환하게 켜둔 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던 그 밤들,

냄새나는 음식은 입에도 대지 못하고 돼지고기는 쳐다보지도 않던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나는 우리가 정말 섞일 수 있을까 고민도 하곤 했다.




하지만 사랑은 결국 보이지 않는 경계를 넘어서는 일이었다.


어느 날부턴가 그녀는 운전하는 내 옆자리에 앉아 직접 숙소 리뷰를 꼼꼼히 읽기 시작했다.

어디가 깨끗한지, 어디가 새로 단장을 했는지 정보를 찾더니

이제는 사진 몇 장만으로도 옥석을 가려내는 숙소 전문가가 되어버렸다.


장터에 가면 과일 코너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가족들을 챙기며 차 트렁크 가득

온정을 싣고 다니는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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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이제 냉삼집이나 국밥집에서도 한 그릇을 뚝딱 비워내며

"생각보다 참 맛있다"고 환하게 웃어주는 그녀의 변화다.


나는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라도 상대가 싫어하면 기꺼이 포기할 수 있고,

내가 싫어하는 것이라도 상대가 좋아하면 기꺼이 시작해 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애정의 가장 정직한 척도라고 말이다.


그녀는 그렇게 자신의 안락했던 세계를 잠시 접어두고

내가 사는 투박한 세상으로 한 걸음씩 걸어 들어와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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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그런 그녀에게 보답하기 위해 내 오랜 습관 하나를 내려놓기로 했다.


그녀는 내가 가끔 술을 과하게 마시는 것을 진심으로 걱정했다.

그 눈빛에 서린 염려가 너무나 깊어 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술을 끊었다.


친구들과 소주잔을 기울이던 시간이나 맥주 한 캔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던

저녁이 가끔 그립기도 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보다

내 갈증을 참는 편이 훨씬 쉬웠다.


그녀가 나를 위해 재래시장을 배우고 돼지고기를 먹게 된 것처럼,

나 또한 그녀를 위해 기꺼이 내 즐거움을 양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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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서로의 세계를 여행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낯설고 불편한 이국의 땅처럼 느껴질지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손을 잡고 걷다 보면 그곳은 결국 우리의 가장 편안한 장소가 된다.


우리가 서로를 위해 변화하고 배려하고 참아내는

이 모든 수고로움이 결코 짐이 되지 않는 이유는,

이것이 나와 그녀, 우리 생의 마지막 사랑이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다.


그녀가 내 세계로 걸어온 그 모든 용기 있는 걸음에 깊은 존경과 감사를 보낸다.


당신이 내 세계로 걸어와 주어서, 참으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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