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기다림의 길이에 비례한다

어느 늦깎이 사랑의 줄 서기 고백. 까칠한 한량을 줄 세운 그녀의 미소

by 까칠한 한량


쉰여덟, 이 나이가 되면 세상에 참을 수 없는 게 몇 가지 생긴다.

그중 으뜸은 단연 기다리는 일이다.

젊었을 때야 열정도 넘치고 시간도 자산이라지만,

이제 우리는 1분 1초가 아까운 시간의 베테랑들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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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보면


"허허, 저걸 언제 다 기다리나. 옆집 가서 대충 먹든지, 아님 바쁜 시간을 피해야지"라며

혀를 끌끌 차는 게 나의 보통의 모습이다.


꼭 가봐야할 집은 피크타임을 피해서 어찌어찌 가긴하지만...

맛집 찾아 다니며 글을 써도 기다리는건 고역이다....



효율과 합리를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며 살아온 세월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생은 참 얄궂다.

이 늦은 나이에 다시 사랑을 배우기 시작하니,

평생 안 하던 줄 서기가 내 일상의 중요한 이벤트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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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깊이는 기다림의 시간과 비례한다는 명제.

나는 요즘 그 명제를 온몸으로,

특히 조금씩 쑤셔오는 내 무릎으로 증명하고 있다.


그간 내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했던,

그러나 그녀의 환한 미소로 기꺼이 보상받았던


사랑의 줄 서기 잔혹사(史)를 기록해 본다.


1. 안국동의 치열한 아침, 런던 베이글 뮤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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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을 줄 서서 먹는다니, 내 사전엔 도저히 없던 일이다.

아침 9시에 도착해 대기 티켓을 받기 위해 한 시간을 서고,

다시 입장하기 위해 또 한 시간 삼십분을 길바닥에서 보냈다.


젊은 친구들 틈바구니에서 쭈뼛거리며 "무슨 베이글이 맛있나"

스마트폰을 검색하는 내 모습이 스스로도 참 생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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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갓 구운 베이글을 입에 물고

"정말 맛있긴 하네!"라며 아이처럼 좋아하는 그녀를 보니,


런던 베이글이 진짜 영국 런던에 있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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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시간의 인내, 용산 능동 미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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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50팀이나 남았네."

대기 번호를 확인한 그녀의 입에서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한참을 고민했다...갈것이냐...기다릴것이냐...


하지만 그녀가얼른 재치를 발휘했다.

근처 용산 아이파크몰을 한 바퀴 돌며 이것저것 구경하는 시간 벌기 작전을 펼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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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3시간 만에 마주한 초록빛 미나리 곰탕.

국물 한 모금에 "맛있긴 하네!"라는 라며 기다림에 속은 상하고 입 언저리는 만족했던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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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값보다 주차비와 부수적인 비용이 몇배를 초과한것 같다..... 여자와 아이파크 몰이라니....




3. 대전, 성심당이라는 거대한 벽


여행 길에 가볍게 들렀다가 된통 당했다.

빵집이 아니라 무슨 축구 국가대표 경기장인 줄 알았다.

지금도 1년에 두어 번씩 이 곤욕을 치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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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먼저 산 튀김 소보로 박스를 들고,

딸기가 장난 아니게 올라간 케이크를 사기 위해 다시 길게 늘어선 줄 끝에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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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 이렇게 간절하게 빵을 원했던 적이 있었나?'

싶었지만, 성심당 앞에서 따뜻한 빵 봉투와 케이크를 품에 안고

인증샷을 찍는 그녀를 본 순간,

나는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빵 배달부가 되었다.




4. 뙤약볕 아래의 고행, 논산 반월소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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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바는 금방 먹고 일어나는 음식인데 왜 이리 안나와?

그런데 논산 반월소바 앞은 시간이 멈춘 듯했다.


뙤약볕 아래서 부채질하며 기다리는 두 시간이 꽤나 고달팠지만,

곁에 선 그녀와 도란도란 옛날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 기다림조차 근사한 데이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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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맛있는 인생 소바가 된 시원한 소바 국물을 들이키며

마주 본 그녀의 얼굴은 그날의 햇살보다 눈부셨다.


지금생각해 보니 눈부신게 땀 때문이었을것 같다...




5. 고성의 끝자락, 백촌 막국수의 인내심 테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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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정말 끝판왕이었다.

고성까지 달려가는 설렘도 잠시, 가게 앞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이걸 굳이 먹어야 하나라는 본능적인 거부감이 불쑥 올라올 때쯤,

내 심정을 눈치챈 그녀가 내 손을 꼭 잡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먹고 가야지, 좀만 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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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한마디에 내 인내심은 반강제로 우주만큼 확장되었다.

마침내 마주한 막국수의 담백한 맛은 우리가 함께 견뎌온 3 시간의 깊이만큼이나 깊고 고소했다.


이제 나는 안다.

줄을 서는 시간은 단순히 버려지는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나도 함께 좋아하고 싶다는 무언의 고백이며,

당신의 기쁨을 위해 내 소중한 시간을 기꺼이 내어놓겠다는 가장 정중한 헌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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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여덟,

조금 늦게 다시 배운 사랑은 이토록 겸손하고 다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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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의 맨 끝에 서서 앞사람의 뒷통수를 보며,

나는 오늘도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정성스러운 선물인 기다림을 선사한다.

그녀가 맛있게 먹는 모습, 그 눈빛 하나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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