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기억 속의 시간들
화창한 토요일 아침, 대학생 딸아이가 개학 준비를 핑계로 늦잠 자는 나를 흔들어 깨웠다. 기숙사에 보낼 짐도 싸고, 가을 학기에 입을 옷도 사야 한다며 갖은 아양을 떨었다.
"아빠, 일어나. 쇼핑 가야지."
"너무 일찍 아니야?"
"벌써 11시야. 늦게 나가면 사람 많아."
툴툴거리면서도 못 이기는 척 차를 몰아 딸이 가자는 백화점으로 향했다.
요즘 아이들은 참 똑똑하다. 언제 커서 이렇게 능숙하게 아빠를 부려먹을 줄 알게 되었나.
몇 년 전, 16년의 결혼 생활을 마무리하고 아니와 둘이 같이 지내다, 지방의 대학으로 입학한 딸...
이혼의 아픔이 딸에게라도 뭍을라 잘한다고 했지만 딸에겐 늘 미안하고 고바운 존재였다.
딸은 1층에 들어서자마자 물 만난 고기처럼 이곳저곳을 누비기 시작했다.
나는 하품을 하며 시계만 쳐다볼 뿐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다리에 힘이 빠지고, 곧 닥칠 지갑의 붕괴를 예감하며 짜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딸의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품을 연신해대며
어느새 5층까지 돌고 나니 딸의 양손에는 내 카드로 산 쇼핑백이 여러 개 들려 있었다.
미안했는지, 딸은 점심으로 부대찌개를 사겠다며 나를 식당가로 이끌었다.
"아빠, 미안해. 너무 많이 샀지?"
"괜찮아. 팍팍 사..."
"진짜? 그럼 지금 생각 안난 건 나중에 또 올 수 있어?"
"그건 아니야."
서로 낄낄대며 팔짱을 끼고 위층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로 가기 위해 모퉁이를 도는 순간이었다.
반대편에서 무리져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한 여인의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노안이 시작된 눈의 초점을 다시 맞추자, 스무 해 전 내 여자였던 그녀가 그곳에 서 있었다.
시간이 멈췄다. 주변의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세상에는 오직 그녀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20여 년이라는 시간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옆에 있는, 꼭 자신을 닮은 딸과 함께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의 딸은 내 딸과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그녀 역시 나를 발견했는지 잠시 걸음을 멈칫하다, 이내 고개를 들어 나를 보고 아주 살며시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었다.
그 미소는 변하지 않았다. 20년 전 그 미소 그대로였다. 몇 개의 잔 주름만이 추가되었을뿐..
내 옆에서 옷을 구경하는 내 딸과 나를 번갈아 보며, 그녀는 우리가 연애 시절 주고받았던, 우리만이 아는 그 눈빛을 보냈다. 그 눈빛 속에는 수많은 문장이 담겨 있었다.
'당신을 많이 닮았네요. 참 좋아 보여요.'
'당신 옆에 있는 아이도 참 예뻐. 당신 젊었을 때 모습 같네.'
우리는 짧은 눈빛으로 마음속 대화를 나누었다. 그 몇 초의 시간 동안, 20년의 공백이 순식간에 메워지는 것 같았다.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알고 있었다. 서로의 생각을, 서로의 마음을.
그리고 우리는 스쳐 지나갔다. 그게 전부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스쳐 지나갔을 뿐이었다.
그녀의 옆을 지나는 그 찰나의 순간, 나는 숨을 멈췄다. 낯익지만 오래도록 잊고 지냈던 그녀의 향기. 그것이 샤넬 넘버 5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향기가 그녀의 것임은 분명했다.
20년이 지났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 향이 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향수가 아니라 그녀 자체의 냄새였을지도 모른다. 내 기억 속에 영원히 새겨진 그녀만의 향기.
에스컬레이터에 올라서서도 나는 한참 동안 숨을 내쉬지 못했다.
"아빠, 왜 그래? 아는 사람이었어?" 딸이 물었다.
"아니야. 그냥 아는 사람 같아서."
"그 아줌마 예쁘던데? 딸도 예쁘고."
"그래?"
"아빠 표정보니 드라마 쓰는 줄 알았어. 운명적인 재회? 뭐 그런 거 아닌가 해서"
딸의 말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운명적인 재회라.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미 늦어버린, 다른 인생을 살게 된 두 사람의 재회는 그저 아름다운 추억으로 또 그렇게 지나갔다.
식당에서 부대찌개를 먹으면서도, 나는 계속 그녀를 생각했다. 그녀는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행복했을까. 가끔은 나를 생각했을까.
"아빠, 정말 괜찮아? 얼굴이 이상해."
"응, 괜찮아.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무슨 옛날 생각?"
"그냥..."
딸에게 차마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온갖 감정들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리움, 후회, 안타까움, 그리고 이상하게도 안도감까지. 그녀가 행복해 보였다는 것이 나를 안심시켰다.
눈가에 주름이 생겼지만 여전히 아름다웠고, 딸과 함께 쇼핑을 즐기는 모습이 평온해 보였다. 아마 좋은 남편을 만나 좋은 가정을 이루었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헤어졌지만, 내 아내는 그녀와는 다른 매력의 좋은 여자였고, 우리 딸은 내 인생의 가장 큰 기쁨이었다. 우리 각자가 우리만의 행복을 찾아 살아온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시절의 사랑이 의미 없는 것이 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첫사랑이 있었기에 내가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고, 그 경험이 있었기에 지금의 가정도 더 소중하게 여길 수 있었던 것이다.
"아빠, 혹시 그 아줌마가 아빠 첫사랑이야?" 딸이 갑자기 물었다.
나는 숟가락을 들다가 멈췄다. "왜 그런 걸 물어?"
"그냥. 아빠 표정이 완전 그런 표정이었거든. 드라마에서 보던 그런 표정."
요즘 아이들은 참 눈치가 빠르다.
"먹자. 부대찌개 다 식어간다."
"아, 답답해. 아빠는 왜 이렇게 재미없어? 로맨스가 없다니까."
딸의 투정을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로맨스가 없다고? 천만에.
내 인생에는 지금도 그 향기가 남아있다. 단지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피곤했는지, 딸은 금세 잠이 들었다. 쇼핑으로 지쳤나 보다.
나는 조용히 운전하면서, 하루 종일 머릿속을 맴도는 그녀의 모습을 정리해보려 했다.
20년이라는 시간이 우리를 어떻게 바꾸어놓았는지 새삼 놀라웠다. 하지만 동시에 변하지 않은 것들도 있었다. 그녀의 미소, 그녀의 눈빛, 그리고 그녀의 향기. 그것들은 여전히 내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