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향기는 기억이다
집으로 돌아와 텅 빈 방에 들어와 앉으니, 오늘 마주친 그녀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가끔씩 생각날 때마다 그려보던 모습 그대로, 단정하고 온화한 얼굴에 눈가의 옅은 주름만이 우리가 함께하지 못한 세월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녀가 곱게 나이 들어준 것이 고마워,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았다.
첫사랑이 비참하게 늙어있거나 불행해 보였다면 얼마나 마음 아팠을까.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행복해 보였다.
온종일 딸과 함께 있다가 각자의 방에 들어가 나 혼자 있으니 공간이 더없이 조용했다.
이런 고요함 속에서 나는 더욱 선명하게 과거를 떠올릴 수 있었다.
늦은 밤, 커피를 타 들고 딸아이의 방으로 들어갔다. 딸은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요즘 아이들은 정말 휴대폰 없이는 못 사나 보다.
화장대를 무심코 들여다보며 한마디 건넸다.
"넌 샤넬 넘버 5 같은 거 안 쓰니?"
딸은 휴대폰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무심하게 대답했다.
"우린 그런 거 안 써. 비싸기도 하고. 사주지도 않을 거면서. 왜, 향수 선물할 사람 생겼어? 새엄마 후보?"
나는 "시끄럽다"며 방을 나서려 했다. 등 뒤로 딸의 명랑한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오, 아빠 축하해! 난 완전 환영이야! 아, 그런데 그 사람이 오늘 만난 그 아줌마야?"
"야, 너 정말..."
"맞지? 내 눈을 못 속여. 아빠 완전 티 났어."
새엄마든 헌 엄마든, 지금 내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다만 오늘, 마음 한구석에 먼지 쌓인 채 잠들어 있던 첫사랑의 추억과 향기를 다시 확인할 수 있어서 행복할 뿐이다.
내 방으로 돌아와 창문을 열었다. 창밖에는 예고 없던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상했다. 낮에는 맑았는데. 라디오를 틀어보니 좋아하는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김동희의 '썸데이'였다.
"어느 날 그대를 만나서 사랑의 기쁨을 깨닫고
나 같은 여자도 사랑을 알게 했다오"
노래를 들으며, 나는 문득 궁금했다. 나와 20분 거리에 산다고 들었었는데..
그녀도 오늘 밤, 나와 같은 기분일까. 같은 추억을 떠올리며, 같은 그리움을 느끼고 있을까.
아니면 이미 모든 것을 잊고 평온한 잠에 빠져 있을까.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그 시절의 사랑이 여전히 내 마음속에 아름답게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이 있었기에 내가 지금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책상 서랍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였다. 금연을 약속한지 3년이 되었는데, 오늘만큼은 예외로 하고 싶었다. 내일 아침 딸의 잔소리를 각오하며, 나는 길고 깊게 연기를 빨아들였다.
연기와 함께 떠오르는 것은 26살의 나와 25살의 그녀였다. 혜화동의 그 작은 카페에서, 샤넬 넘버 5를 선물받고 아이처럼 기뻐하던 그녀의 모습. 그때 우리는 몰랐다. 그것이 우리가 나눈 마지막 선물이 될 줄은.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 듯한, 완벽한 밤이었다.
이 이야기를 쓰면서 나는 계속 생각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첫사랑은 왜 특별한 것일까.
아마도 첫사랑이 특별한 이유는 그것이 가장 순수한 형태의 사랑이기 때문일 것이다. 계산도 없고, 조건도 없는. 그저 그 사람이 좋아서,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 행복해서 시작되는 사랑.
나이가 들면서 우리는 현실적이 된다. 상대방의 조건을 따지게 되고, 미래를 계산하게 된다. 그런 사랑도 나름의 의미가 있고 행복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첫사랑의 그 떨림, 그 순수함은 다시 올 수 없다.
향수도 마찬가지다. 샤넬 넘버 5는 그냥 향수가 아니다. 그것은 그 시절의 우리를, 그 시절의 사랑을, 그 시절의 꿈을 담고 있는 시간캡슐이다. 그래서 그 향기를 맡으면 우리는 순식간에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그런 향기가 있을 것이다. 어떤 노래든, 어떤 장소든, 어떤 물건이든. 그것을 만나는 순간 시간이 멈추고, 마음이 벅차오르는 그런 것들이.
그것들을 소중히 간직하라. 그것들이 있는 한, 당신의 청춘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들이 있는 한, 당신은 여전히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다.
사랑은 영원하다. 비록 사람은 떠날 수 있어도, 사랑은 향기가 되어 우리 곁에 남는다.
그리고 때로는, 완벽한 밤에, 우리는 그 향기를 다시 만날 수 있다.
"모든 어른은 한때 아이였다. 하지만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다."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중에서
이 글을 첫사랑의 향기를 기억하는 모든 어른들에게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