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탑 위의 그녀

오후 5시 50분의 의식

by 까칠한 한량



매일 오후 5시 50분,


오늘도 나는 어감없이 하나의 의식을 치른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서는 일상의 성찰.


담배 한 대를 입에 물고,

가늘고 짧은 다리로 부산하게 걸어가는 이 시간이 하루 중 가장 간절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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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버스정류장 뒤 길모퉁이,

그녀의 작은 커피숍. 그곳은 나에게 성지와 같은 곳이다.


카푸치노 한 잔을 시키고 매서운 눈초리로 빈 자리를 찾는다.

운이 좋으면—아니, 운명이 허락하면 그녀가 잘 보이고 그녀의 목소리가 잘 들리는 자리에 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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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늘은 운이 좋다.


노트북을 펼치고 시선을 고정한 채, 나머지 모든 감각은 그녀를 향한다.

참 목소리가 청량하고 눈이 예쁜 그녀. 이 묘한 이중생활 속에서 나는 작가인 척하며,

한 여인네를 짝사랑하는 남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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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시의 아쉬움


두dj 어시간이 흐르고, 나는 노트북에 써놓은 글 나부랑이들을 저장한다. 식은 카푸치노를 입에 털어넣고, 카운터에 잔을 건네며 그녀를 힐끗 바라본다. 가벼운 눈 인사로 숨겨진 마음을 전달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녀의 카페를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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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그 시간이면 한 남자가 나타나 매장을 청소하고 쓰레기를 버리며 그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그녀의 남편인지도 모를 그 남자. 나는 그 모습이 보기 싫고, 동시에 그가 부럽다.

질투와 동경 사이에서 흔들리는 중년 남자의 초라함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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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스러운 것은 그녀와 그 남자가 서로 무덤덤해 보인다는 점이다.


혹시 남편이 아닐 수도 있다는, 나에게는 꽤 유리한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해본다. 무덤덤해 보인다? 그럼 남편인가? 아니 동생일까? 남편인데 사이가 안 좋은 걸까?


에휴...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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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만의 상상 속에서 조금씩 마음과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중년의 짝사랑이란 이토록 간사하고 애틋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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