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산을 찾아온 날

강원도 태백 시장에서 만난 갯벌의 기억

by 까칠한 한량


길이 사람을 부른다고 했던가요. 미술랭가이드에서 선정한 국내 유일의 아름다운 길,

35번 국도가 저를 불렀습니다. 1년에 한번 정도는 꼭 달리는 길....

올해는 바쁘다는 핑계로 못 다녀왔지만,,,낙엽이 시작될 무렵엔 꼭 다녀오려고 합니다..


이 내용은 작년에 다녀와 적어둔 내용입니다.



커피.여행..그리고 일상에 대한 끄적임_사진_20230611_2.jpg


안동 도산서원에서 시작해 태백까지 이어지는 이 길은, 단순한 아스팔트 위의 선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는 하나의 서사였고,

제 마음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무언가를 깨우는 신호였습니다.



길 위에서 만난 시간들


커피.여행..그리고 일상에 대한 끄적임_사진_20230611_6.jpg


안동 도산서원을 출발하여 구불구불 이어지는 35번 국도를 따라 올라가니,

강과 산이 어우러진 풍경이 차창 밖으로 펼쳐졌습니다.

바위산과 울창한 숲이 교대로 나타났다 사라지며,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연발하게 했습니다.

운전 중 잠깐잠깐 차를 세우고 찍은 사진들로는 그 아름다움을 다 담을 수 없었습니다.

어떤 순간들은 카메라보다는 마음에 새기는 것이 더 선명하게 남는 법입니다.


커피.여행..그리고 일상에 대한 끄적임_사진_20230611_2.jpg



경북 봉화를 지나며 만난 청량산 도립공원의 투명한 강물,

마을 전체가 문화재로 선정된 닭실마을의 고즈넉함.

그리고 봉화 산천어마을의 텅 빈 건물들이 만들어내는 묘한 적막감까지.

사람은 없지만 시간은 그곳에 고스란히 쌓여 있었습니다.


커피.여행..그리고 일상에 대한 끄적임_사진_20230611_13.jpg


빈 건물들 사이로 스며드는 오후 햇살을 보며, 문득 이곳에 카페를 열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봤습니다.

저 바위산 전경이 다 제 것이 될 텐데, 하며 직업병처럼 주소까지 캡처해두었습니다.


참고로 몇년전까지 카페 체인의 대표였습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하적한 곳에가서 커피를 내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커피.여행..그리고 일상에 대한 끄적임_사진_20230611_11.jpg



구문소의 바위 터널을 지나 태백에 도착했을 때, 저는 이미 이 여행의 목적지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태백 스피드웨이의 굉음도, 철암 근대화거리의 향수도 아니었습니다.


커피.여행..그리고 일상에 대한 끄적임_사진_20230611_18.jpg
커피.여행..그리고 일상에 대한 끄적임_사진_20230611_19.jpg
커피.여행..그리고 일상에 대한 끄적임_사진_20230611_22.jpg
커피.여행..그리고 일상에 대한 끄적임_사진_20230611_27.jpg


바로 한 끼 식사에 대한 간절함....


산골에서 만난 바다의 선물


태백 장성면, 토요일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죽은 도시처럼 조용한 이곳에서

저는 '갯벌낙지'라는 간판을 발견했습니다.


커피.여행..그리고 일상에 대한 끄적임_사진_20230611_6.jpg


20여 년 전만 해도 13만 명이 넘었다는 태백의 인구가 이제는 고작 2만여만 명 수준.

그 쓸쓸함 속에서 만난 이 작은 식당이 더욱 반갑게 느껴졌습니다.


커피.여행..그리고 일상에 대한 끄적임_사진_20230611_8.jpg


실내 공간은 6평 남짓, 가운데 메뉴판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시골 장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림들이 걸려 있었습니다. 평범해 보이는 이 공간에서 곧 일어날 맛의 즐거움을 저는 아직 몰랐습니다.



커피.여행..그리고 일상에 대한 끄적임_사진_20230611_11.jpg


콩나물과 콩나물국, 양배추무침 그리고 계란찜, 옥수수콘샐러드가 차례로 나왔습니다.

비벼 먹으라고 나온 김과 참기름이 잔뜩 부어진 대접에 밥 한 공기를 넣고 비벼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인공이 등장했습니다.

낙지덮밥. 양념 반, 낙지 반이라고 해야 할까요? 붉은 양념 사이로 꿈틀거리는 듯한 낙지다리들이 보였습니다.



커피.여행..그리고 일상에 대한 끄적임_사진_20230611_10.jpg


첫 숟가락을 입에 넣는 순간, 아니 들어설때부터 저는 깨달았습니다.


이 음식은 맛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바다에서 태어난 낙지가 험준한 태백산맥을 넘어 이곳까지 온 것,

그리고 이 작은 식당의 주인이 정성으로 버무려낸 양념이 만나 이미 머리속으로 맛이 그려졌습니다.



커피.여행..그리고 일상에 대한 끄적임_사진_20230611_22.jpg


산에서 먹는 낙지덮밥.

이 모순적이면서도 조화로운 만남이 제 입안에서 펼쳐졌습니다.

쫄깃한 낙지의 식감과 매콤달콤한 양념,

그리고 고슬고슬한 밥알이 어우러지며 만들어내는 맛.

바다의 짠맛과 산의 정기가 한 그릇에서 만나는 순간.



한 그릇에 담긴 이야기


낙지 한 마리가 서해안 갯벌에서 이 태백의 산골까지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쳤을까요?

새벽 갯벌에서 낙지를 잡는 어민의 손, 그것을 선별하고 포장하는 이의 손,

산길을 달려 이곳까지 운반하는 이의 손,

그리고 마침내 이 작은 식당에서 정성스럽게 요리하는 주인의 손까지.


각각의 손길마다 이야기가 있었고,

그 모든 이야기가 지금 제 앞의 이 한 그릇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커피.여행..그리고 일상에 대한 끄적임_사진_20230611_5.jpg


태백은 물닭갈비로도 유명하다고 했지만, 오늘부터는 이 낙지덮밥도 제 기억에 깊이 새겨질 것 같았습니다.

한 숟가락, 또 한 숟가락 떠먹으며 저는 생각했습니다. 음식이란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시간과 공간을 담아내는 그릇이라는 것을요.


이 낙지덮밥 한 그릇에는 서해의 파도소리와 태백의 산바람이 함께 들어있었고,

바다 사람의 땀과 산 사람의 정성이 녹아있었습니다.


마지막 한 숟가락까지 깨끗하게 비운 그릇을 바라보며, 저는 이 여행의 진짜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35번 국도의 아름다운 풍경도 좋았지만, 결국 여행의 백미는 이런 예상치 못한 만남에 있었습니다.

산골 식당에서 만난 바다의 맛,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들 말입니다.


길의 끝에서


커피.여행..그리고 일상에 대한 끄적임_사진_20230611_2.jpg
커피.여행..그리고 일상에 대한 끄적임_사진_20230611_4.jpg
커피.여행..그리고 일상에 대한 끄적임_사진_20230611_3.jpg
커피.여행..그리고 일상에 대한 끄적임_사진_20230611_1.jpg


태백을 떠나며 돌아본 철암 근대화거리의 모습은 또 다른 감회를 불러일으켰습니다.

한때 흥했던 탄광촌의 명과 암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이곳에서,

저는 꽈배기 한 봉지를 사며 이 여행을 마무리했습니다.


서울까지 국도로 4시간 40분. 늘어지는 해와 구름이 아름다운 시간,

천천히 천천히 눈에 담을 수 있는 시간까지 좋은 것들을 담고 가고 싶었습니다.


커피.여행..그리고 일상에 대한 끄적임_사진_20230611_4.jpg
커피.여행..그리고 일상에 대한 끄적임_사진_20230611_7.jpg
커피.여행..그리고 일상에 대한 끄적임_사진_20230611_5.jpg
커피.여행..그리고 일상에 대한 끄적임_사진_20230611_9.jpg



35번 국도가 선사한 것은 단순한 풍경 이상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잊고 살았던 것들에 대한 상기였고,

평범한 일상 속에 숨어있는 특별함에 대한 발견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 그릇의 낙지덮밥이 전해준 따뜻함과 위로였습니다.


커피.여행..그리고 일상에 대한 끄적임_사진_20230611_8.jpg


길은 여전히 그곳에 있고, 그 길 위에는 오늘도 누군가의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태백 장성면 어느 작은 식당에서는,

바다에서 온 낙지가 산사람의 정성과 만나 또 다른 기적을 만들어내고 있을 것입니다.


갯벌낙지 강원 태백시 장성시장1길 34-8

keyword
작가의 이전글장원급제라는 이름의 호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