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태백 시장에서 만난 갯벌의 기억
길이 사람을 부른다고 했던가요. 미술랭가이드에서 선정한 국내 유일의 아름다운 길,
35번 국도가 저를 불렀습니다. 1년에 한번 정도는 꼭 달리는 길....
올해는 바쁘다는 핑계로 못 다녀왔지만,,,낙엽이 시작될 무렵엔 꼭 다녀오려고 합니다..
이 내용은 작년에 다녀와 적어둔 내용입니다.
안동 도산서원에서 시작해 태백까지 이어지는 이 길은, 단순한 아스팔트 위의 선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는 하나의 서사였고,
제 마음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무언가를 깨우는 신호였습니다.
안동 도산서원을 출발하여 구불구불 이어지는 35번 국도를 따라 올라가니,
강과 산이 어우러진 풍경이 차창 밖으로 펼쳐졌습니다.
바위산과 울창한 숲이 교대로 나타났다 사라지며,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연발하게 했습니다.
운전 중 잠깐잠깐 차를 세우고 찍은 사진들로는 그 아름다움을 다 담을 수 없었습니다.
어떤 순간들은 카메라보다는 마음에 새기는 것이 더 선명하게 남는 법입니다.
경북 봉화를 지나며 만난 청량산 도립공원의 투명한 강물,
마을 전체가 문화재로 선정된 닭실마을의 고즈넉함.
그리고 봉화 산천어마을의 텅 빈 건물들이 만들어내는 묘한 적막감까지.
사람은 없지만 시간은 그곳에 고스란히 쌓여 있었습니다.
빈 건물들 사이로 스며드는 오후 햇살을 보며, 문득 이곳에 카페를 열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봤습니다.
저 바위산 전경이 다 제 것이 될 텐데, 하며 직업병처럼 주소까지 캡처해두었습니다.
참고로 몇년전까지 카페 체인의 대표였습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하적한 곳에가서 커피를 내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구문소의 바위 터널을 지나 태백에 도착했을 때, 저는 이미 이 여행의 목적지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태백 스피드웨이의 굉음도, 철암 근대화거리의 향수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한 끼 식사에 대한 간절함....
태백 장성면, 토요일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죽은 도시처럼 조용한 이곳에서
저는 '갯벌낙지'라는 간판을 발견했습니다.
20여 년 전만 해도 13만 명이 넘었다는 태백의 인구가 이제는 고작 2만여만 명 수준.
그 쓸쓸함 속에서 만난 이 작은 식당이 더욱 반갑게 느껴졌습니다.
실내 공간은 6평 남짓, 가운데 메뉴판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시골 장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림들이 걸려 있었습니다. 평범해 보이는 이 공간에서 곧 일어날 맛의 즐거움을 저는 아직 몰랐습니다.
콩나물과 콩나물국, 양배추무침 그리고 계란찜, 옥수수콘샐러드가 차례로 나왔습니다.
비벼 먹으라고 나온 김과 참기름이 잔뜩 부어진 대접에 밥 한 공기를 넣고 비벼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인공이 등장했습니다.
낙지덮밥. 양념 반, 낙지 반이라고 해야 할까요? 붉은 양념 사이로 꿈틀거리는 듯한 낙지다리들이 보였습니다.
첫 숟가락을 입에 넣는 순간, 아니 들어설때부터 저는 깨달았습니다.
이 음식은 맛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바다에서 태어난 낙지가 험준한 태백산맥을 넘어 이곳까지 온 것,
그리고 이 작은 식당의 주인이 정성으로 버무려낸 양념이 만나 이미 머리속으로 맛이 그려졌습니다.
산에서 먹는 낙지덮밥.
이 모순적이면서도 조화로운 만남이 제 입안에서 펼쳐졌습니다.
쫄깃한 낙지의 식감과 매콤달콤한 양념,
그리고 고슬고슬한 밥알이 어우러지며 만들어내는 맛.
바다의 짠맛과 산의 정기가 한 그릇에서 만나는 순간.
낙지 한 마리가 서해안 갯벌에서 이 태백의 산골까지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쳤을까요?
새벽 갯벌에서 낙지를 잡는 어민의 손, 그것을 선별하고 포장하는 이의 손,
산길을 달려 이곳까지 운반하는 이의 손,
그리고 마침내 이 작은 식당에서 정성스럽게 요리하는 주인의 손까지.
각각의 손길마다 이야기가 있었고,
그 모든 이야기가 지금 제 앞의 이 한 그릇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태백은 물닭갈비로도 유명하다고 했지만, 오늘부터는 이 낙지덮밥도 제 기억에 깊이 새겨질 것 같았습니다.
한 숟가락, 또 한 숟가락 떠먹으며 저는 생각했습니다. 음식이란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시간과 공간을 담아내는 그릇이라는 것을요.
이 낙지덮밥 한 그릇에는 서해의 파도소리와 태백의 산바람이 함께 들어있었고,
바다 사람의 땀과 산 사람의 정성이 녹아있었습니다.
마지막 한 숟가락까지 깨끗하게 비운 그릇을 바라보며, 저는 이 여행의 진짜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35번 국도의 아름다운 풍경도 좋았지만, 결국 여행의 백미는 이런 예상치 못한 만남에 있었습니다.
산골 식당에서 만난 바다의 맛,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들 말입니다.
태백을 떠나며 돌아본 철암 근대화거리의 모습은 또 다른 감회를 불러일으켰습니다.
한때 흥했던 탄광촌의 명과 암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이곳에서,
저는 꽈배기 한 봉지를 사며 이 여행을 마무리했습니다.
서울까지 국도로 4시간 40분. 늘어지는 해와 구름이 아름다운 시간,
천천히 천천히 눈에 담을 수 있는 시간까지 좋은 것들을 담고 가고 싶었습니다.
35번 국도가 선사한 것은 단순한 풍경 이상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잊고 살았던 것들에 대한 상기였고,
평범한 일상 속에 숨어있는 특별함에 대한 발견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 그릇의 낙지덮밥이 전해준 따뜻함과 위로였습니다.
길은 여전히 그곳에 있고, 그 길 위에는 오늘도 누군가의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태백 장성면 어느 작은 식당에서는,
바다에서 온 낙지가 산사람의 정성과 만나 또 다른 기적을 만들어내고 있을 것입니다.
갯벌낙지 강원 태백시 장성시장1길 3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