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팔 친구가 가져다준 그 시절의 맛

인제 남북면옥에서 다시 만난 청춘의 맛

by 까칠한 한량

이 집의 막국수는 100% 강원도산 순메밀로 만든다.
밀가루를 섞지 않아 면발이 거칠고 쉽게 끊기지만,
그 질감이 오히려 ‘진짜 메밀’을 말해준다.
기계가 아닌 즉석 제면이라,
면이 삶아져 나오는 동안 주방에서 ‘메밀 향’이 먼저 퍼진다.

첫 젓가락은 투박하고, 두 번째 젓가락부터 부드럽다.
한입 머금을 때마다 느껴지는 단맛은
양념의 설탕이 아니라, 메밀 고유의 단맛이다.
육수는 멸치가 아닌 동치미와 사골을 섞은 이중 육수.
시원함 속에 은근한 감칠맛이 깔려 있다.

그리고 감자전.
이 지역의 감자전은 일반적인 전과 다르다.
갈아서 부치는 대신,
강판에 간 감자즙을 그대로 부어 ‘전분을 가라앉혀’ 부친다.
그래서 겉은 바삭하지만 속은 묘하게 젤리처럼 말랑하다.
겉면이 바삭 터질 때 고소한 향이 올라오고,
안쪽에서는 감자의 단맛이 퍼진다.
딱, ‘한 입의 강원도’다.

소주 한 병을 시켜 막국수와 감자전을 번갈아 먹으면
입안이 단조롭지 않다.
메밀의 슴슴함과 감자전의 고소함이 서로를 보완한다.
이 조합은 우연이 아니다.
인제 토박이들이 겨울 외출 때 꼭 찾는 단골식이다.

35년 전, 병장 월급 1만 원을 모아
동기들과 처음 나왔던 그날 이후
모양은 변했지만, 맛은 그대로다.
‘자극 없는 맛’이 이렇게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는 건,
그만큼 정직하게 지켜왔다는 뜻이다.

한 젓가락의 순메밀,
한 조각의 감자전,
그리고 한 잔의 소주.

그 세 가지가 만들어내는 건 단순한 식사가 아니다.
세월의 변화를 묵묵히 받아들이며
자신만의 리듬을 잃지 않는 시간의 맛이다.

가을이 깊어진 날, 인제 남북리의 ‘남북면옥’을 다시 찾았다.


입구 간판은 새로워졌고, 식당의 위치도 옮겨졌지만


문을 여는 순간 퍼지는 메밀의 은은한 향이


그 시절 그대로였다.

1990년 겨울, 전역을 코앞에 둔 우리 대대의 동기 다섯 명은
하릴없이 한 내무반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하도 할 일이 없으니,
한 녀석은 낮잠을 자고,
또 한 녀석은 ‘수양록’을 쓴다며 진지하게 노트를 붙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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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자동차 회사에 다니는 친구와 나란히 앉아
낡은 기타를 튕기며 노래책을 넘기고 있었다.


그때 유행하던 신촌블루스의 아쉬운을 노래를 흥얼거리며 장난을 치던 중,
노래책 뒤편의 펜팔 코너가 눈에 들어왔고.


“야, 다섯 명이서 주소 하나씩 찍자.
그래서 제일 먼저 답장 오는 놈이 나머지 놈들 담달 월급 다 가져가는 거다.”


그 말에 모두 박장대소했다.
그리고 장난 반, 진심 반으로 주소를 하나씩 적었다.


나도 무심코 부산의 한 주소를 골라,
한 장짜리 편지를 썼다.


‘안녕하세요. 저는 인제에 있는 군인입니다. 날씨가 춥네요.’


그저 그런 인사였지만, 묘하게 설렜다.


한 달쯤 지났을까,
내가 제일 먼저 답장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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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내무반은 난리가 났다.
“야, 한량이 이겼다!”
“병장 월급 다 털렸다!”

그때 병장 월급은 만 원.
다섯 명의 월급을 몽땅 모으니 오만 원.
그 돈으로 다음 일요일,

같이 면회를 나왔던 친구와 함께 인제 읍내로 향했다.
그때 점심에 소주 한잔 하며, 들른 곳이 남북리의 남북면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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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름한 간판, 낡은 나무의자, 스테인리스 식기.
문을 열자마자 퍼지는 동치미 국물의 시큼한 냄새.
막국수 한 그릇, 감자전 한 장, 그리고 소주 한 병.
세상 시름이 다 녹아내리던 오후였다.

자극적이지 않은 막국수의 슴슴한 맛,
그리고 감자전의 고소함이
그날만큼은 세상 어느 음식보다 따뜻했다.


그 후 두어번 편지를 주고 받가봐 흐지부지된 그 편지들....




35년이 흘러,
나는 다시 인제에 섰다.



간판에 새겨진 ‘남북면옥’ 네 글자는 여전히 정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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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깊어진 날, 인제 남북리의 ‘남북면옥’을 다시 찾았다.


입구 간판은 새로워졌고, 식당의 위치도 옮겨졌지만


문을 여는 순간 퍼지는 메밀의 은은한 향이


그 시절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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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의 막국수는 100% 강원도산 순메밀로 만든다.
밀가루를 섞지 않아 면발이 거칠고 쉽게 끊기지만,
그 질감이 오히려 ‘진짜 메밀’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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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가 아닌 즉석 제면이라,
면이 삶아져 나오는 동안 주방에서 ‘메밀 향’이 먼저 퍼진다.

첫 젓가락은 투박하고, 두 번째 젓가락부터 부드럽다.
한입 머금을 때마다 느껴지는 단맛은
양념의 설탕이 아니라, 메밀 고유의 단맛이다.




육수는 멸치가 아닌 동치미와 사골을 섞은 이중 육수.
시원함 속에 은근한 감칠맛이 깔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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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감자전.
이 지역의 감자전은 일반적인 전과 다르다.
갈아서 부치는 대신,
강판에 간 감자즙을 그대로 부어 ‘전분을 가라앉혀’ 부친다.
그래서 겉은 바삭하지만 속은 묘하게 젤리처럼 말랑하다.
겉면이 바삭 터질 때 고소한 향이 올라오고,
안쪽에서는 감자의 단맛이 퍼진다.

소주 한 병을 시켜 막국수와 감자전을 번갈아 먹으면
입안이 단조롭지 않다.



메밀의 슴슴함과 감자전의 고소함이 서로를 보완한다.
이 조합은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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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 전, 병장 월급 1만 원을 모아
동기들과 처음 나왔던 그날 이후
모양은 변했지만, 맛은 그대로다.



‘자극 없는 맛’이 이렇게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는 건,
그만큼 정직하게 지켜왔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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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젓가락의 순메밀,
한 조각의 감자전,
그리고 한 잔의 소주.

그 세 가지가 만들어내는 건 단순한 식사가 아니다.



세월의 변화를 묵묵히 받아들이며
자신만의 리듬을 잃지 않는 시간의 맛이다.


동기들한테 전화나 한번 때려봐야겠다...

소주 한잔하쟈고...뭔 내기를 하지?



#인제남북면옥 #순메밀막국수 #감자전의정석 #슴슴함의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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