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부터 내린 비와 바람이 아침까지 이어졌다. 검회색 하늘에서 비는 쏟아붓듯이 내렸고 바람까지 매우 거셌다. 아이가 등교하는 시간에도 비와 바람은 멈추지 않았다. 학교 앞까지 데려다줘야겠다 싶어 근처에 잠시 주차하고 내리려는데 ‘어?’ 강풍에 문이 열리지 않는다. 이것이 제주의 바람. 애써 차 문을 열어 우산을 쓰고 정문까지 걸어가는데 비, 바람이 더 세게 불어왔다. 아이가 거센 비와 바람에 홀딱 젖는 건 아닐까 걱정이 앞섰던 그 순간, 아이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태연하게 왼손으로 우산살 바로 아래, 우산대의 윗부분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우산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바람을 무찌르는 용사처럼 우산의 바깥 면을 바람이 부는 방향을 향하게 하고는 한발 한 발 내디뎠다. 이 모든 행동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웠고 연속 동작으로 이어져 놀랐다. 거센 비, 바람에 대처하는 법을 누가 매뉴얼 대로 알려줬나 싶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어린이들도 모두 우리 아이와 같은 자세로 바람과 싸우며 우산을 쓰고 천천히 나아갔다. 그 모습에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아직 바람과 타협점을 찾지 못한 몇몇 친구는 우산이 뒤집히기도 했지만 바람에 우산이 여러 번 뒤집혀본 제주 어린이들은 금세 우산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제주도 어린이들의 슬기로운 지혜에게 감탄이 나왔다. 그리고 우리 아이도 제주에 잘 적응한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새로운 일을 계획하며 함께 제주에 내려왔던 남편은 여러 사정으로 3개월도 채 되지 않아 육지로 다시 돌아갔다. 인생은 역시나 계획대로 되지 않으므로 그러한 현실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낯선 곳에서 아이 둘과 남겨져 더 힘들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는 달리, 불편한 감정과 마주하고 누군가가 해주던 ‘당연한’ 일들을 내 손으로 해내며 책임감이 커지고 씩씩해졌다. 거센 제주 비바람에 적응해 가는 아이들을 보며 나도 단단해지고 용감해졌다. 오로지 나의 결정과 선택이 있는 이곳은 오롯이 나만의 섬이었다. 켜켜이 가려진 가면을 벗고 솔직해진 내 모습이 대견하고 만족스러웠다. 자유로움마저 느껴졌다. 비로소 온전히 내가 되었다. 환경도 생활도, 모든 것이 달라졌지만 나 또한 달라졌다는 걸 실감했다. 나에게도 분명 지혜롭고, ‘슬기로운 제주살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