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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 숙종 Jan 08. 2019

5. 벨을 두 번 울리고

 나는 이름 기억을 잘 못한다. 일종의 버릇이다. 누가 이름을 말하면 악착같이 외우려는 의지가 없다. 내 이름을 누가 기억해 주길 기대 하지도 않는다.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날 테니 그땐 알게 되겠지’ 하는 식이다. 이런 ‘이름 무관심’이 ‘얼굴 무관심’으로 전이되는 것이 문제였다. 이름은 몰라도 은근슬쩍 넘어 갈 수 있지만, 얼굴을 못 알아보는 것은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한다. 사람을 만날 때 자주 있는 일이라 모임 장소에 잘 안 간다. 이런 연유로 나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외톨이다. 


 요르단에서도 이름과 얼굴을 기억 못하는 내 습관은 이어졌다. 해외봉사단원으로 파견된 문화부에서 근무를 하려면 직원 이름과 얼굴은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내가 생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아랍어식 이름은 외우기 어려워 ‘용서’ 되지만, 얼굴을 기억 못하면 망신당한다.
 요르단 남자는 몇 번 만나면 기억 된다. 대머리거나 턱수염이 있어서다. 여자는 아무리 뜯어봐도 똑같다. 짙은 눈썹, 십리는 들어간 눈, 오뚝한 코, 누가 누군지 분간이 안 간다. 더구나 히잡까지 둘러쓰고 있어 막막하다. 히잡만 안 써도 헤어스타일로 대충 얼굴을 짐작해 보련만 도무지 방법이 없다. “히잡 때문에 당신을 알 수 없어요!”라고 넋두리하기도 어렵다. 하여튼 히잡은 요르단에 와서 어떻게든 살려고 애쓰는 나를 힘들게 했다.


 이슬람교 여성이 머리에 두르는 천이 히잡(Hijab)이다. 그 형태는 나라별로 차이가 있다. 이란은 앞머리를 드러내는 식으로 쓰고, 요르단은 머리카락을 완전히 가린다. 히잡 말고도 ‘차도르(Chador)’, ‘니캅(Niqab)’, ‘아바야(Abayah)’, ‘부르카(Burqah)’ 등이 아랍권 여성이 쓰는 의상이다. 특히 니캅은 눈만 내놓고 검은 색 천으로 전신을 두르는 옷이다. 보수적인 여성들이 착용하는데, 도시보다는 시골 여성들이 많이 쓴다. 내가 근무하는 문화부에 니캅을 쓰고 일하는 여성은 3명뿐이다. 눈알만 보여서 누가 누군지 도통 알 수 없다.


 니캅을 쓴 여자와 식사를 한 적이 있다. 민망하고 불편했다. 숟가락으로 음식을 떠서 얼굴 가린 천을 앞으로 당겨 벌어진 틈사이로 음식을 입에 넣는다. 밥 먹는 시간이 두 배 걸린다. 보지 않으려 해도 자꾸 시선이 간다. 요르단 여름 기온은 보통 40~50도 정도 된다. 얼굴만 내놓고 온통 가리고 다니는 여성을 보면 안쓰럽다. 이슬람교는 왜 여성에게 히잡을 쓰게 하는지, 나는 히잡을 쓰는 근거를 찾아봤다. 


 “믿는 여성들에게 일러 가로되, 그녀들의 시선을 낮추고 순결을 지키며, 밖으로 드러내는 것 외에는 유혹하는 어떤 것도 보여서는 아니 되느니라……” (코란 제24장 '빛의 장') 
 이것을 보면 여성에게 히잡을 씌우는 목적을 알 것 같다. 여자의 신체를 가려서 남자가 성욕을 느끼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다. 이런 히잡 문화를 이슬람권 밖에서는 여성인권 탄압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 대한 이슬람 측 반론도 만만찮다. 
 “자유롭게 착용한다면 히잡 그 자체는 그냥 의류일 뿐이다. 또 사막에선 머리가 너무 뜨거워 써야 한다.” 
 물론 히잡 착용을 강요받으면 비판 대상이 될 수 있다. 히잡을 강제한 국가는 사우디와 이란뿐이다. 요르단은 여성에게 히잡을 쓰도록 강요하지는 않는다. 이게 사실일까? 의심이 갔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무슬림이면 온 가족이 무슬림인 국가가 요르단이다. 아랍어 과외 선생 ‘이스라’에게 물었다. 
 “무슬림 여성이 히잡을 쓰는 건 아버지 뜻인가?”
 “아니다. 히잡을 쓰라고 부모도 강요하지는 않는다.”
 “그럼 부모가 원치 않아도 벗을 수 있나?”
 “내 자유의지로 쓰고 벗는다. 나도 한동안 벗고 다니다가 몇 년 전부터 다시 썼다.”
 ‘이스라’가 히잡을 쓰고 다니지만, 나랑 악수도 하고 택시도 뒷좌석에 앉아 같이 타고 다닐 만큼 개방적이다. 사실 그녀가 히잡을 벗기도 했었다는 얘기를 나도 들었다. 무슬림 여자가 히잡을 벗는 건 어떤 이유일까? 


 히잡을 벗어서 나를 당황시킨 여자가 있다. 나와 문화부에서 일하는 여성인데 이름이 ‘마날(35)’이다. 별로 친하지 않게 지내는데 그녀가 나를 찾아왔다. 내 이름을 영문으로 써달라고 해서 써 줬더니 책에 사인해서 선물이라며 나한테 줬다. 그녀는 동화 작가였다. 그 후 친해져서 만날 때마다 인사하는 사이가 됐다. 하루는 계단에서 어떤 여자가 반갑게 내 이름을 부르고 지나쳤다. 나는 뒤돌아서 그녀가 누군가? 멀뚱히 바라봤다. 그렇다고 맞대놓고 “당신이 누구세요?”라고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다.


 며칠 후 1층에서 일하는 ‘마날’에게 서류를 주러 갔다가 깜짝 놀랐다. 계단에서 내게 인사한 여자가 ‘마날’이었던 것이다. 히잡을 벗은 그녀의 곱슬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녀가 완전 딴사람이 되어 있어 몰랐다. 왜 히잡을 벗었을까? 친한 남자직원 ‘샤디’한테 물었다.
 “‘마날’이 갑자기 히잡을 벗고 다녀서 놀랐어!”  
 “그렇지, 나도 사실 놀랐어!”
 “무슨 사연이 있어 히잡을 벗었을까?”
 그는 머리위에 손가락을 돌리며 말했다.
 “아마 미쳤겠지?”
  
 그만큼 남자는 여자가 히잡을 벗어 던지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뜻이다. 현지인 남성은 “히잡 쓴 여자가 좋아!”라고 노골적으로 말한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볼 때 이슬람 측이 히잡 문화를 아무리 미화해도 그것은 여성 억압이고 인권 침해의 상징일 뿐이다. 무슬림 남성은 네 명의 부인을 둘 수 있다는 법령(法令)도 같은 맥락이다. 결국 히잡은 여성의 ‘굴레’고 ‘정조대’ 인 셈이다. 
 요르단대학교에 가보면 히잡을 안 쓴 여학생이 30%정도 되는 것 같다. 부모가 학력이 높고 개방적인 가정에서는 딸이 히잡을 벗는 편이다. 히잡을 벗으면 사회성이 높아지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랍 여성들이여 히잡을 벗어 던져라”고 말해주고 싶다. 이제는 ‘히잡을 써야 아랍 여자답다.’라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 히잡이 패션이고 강제성이 없다고 하지만 사회적 제약을 많이 받는다. 히잡은 나와 같은 이방인에겐 높은 벽이었다. 


 요르단은 수영장이 드물다. 힘들게 찾아간 수영장에서 무슬림 여성이 입은 수영복을 보고 놀랐다. 수영복은 여성들의 아름다운 몸매를 드러내기 위해 작게 디자인된 옷이다. 이들 수영복은 얼굴만 보이는 검은 ‘잠수복’이었다. 
 현지 친구 결혼식에 갔을 때다. 신부는 안보이고 넓은 홀에 남자들뿐이었다. 신부가 히잡을 벗고 치장한 머리를 남자들이 보지 못하도록 분리했기 때문이다. 나는 신부 측 하객인데 신랑을 만나는 셈이다. 신랑이 “당신은 누구세요?”하는 눈초리다. 


 현지인 집에 초대받아 간 날이다. 화장실 앞에서 그 집 막내딸이 갑자기 아악! 비명을 질렀다. 히잡을 벗고 화장실 갔다가 나와 마주친 것이다. 나는 잘못 한 것이 없는데도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얼른 피했다. 
 그 집에 처음 갔을 때도 황당한 사건이 있었다. 현관 벨을 눌렀는데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마침 문이 열려 있어 불쑥 들어갔다. 여자들이 갑자기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돌아섰고, 집 주인 ‘마무드’는 뜨악한 눈초리였다. 그가 나를 방으로 데리고 가서 설명해 줬다. 
 “현지인 집을 방문할 땐, 현관에서 벨을 누르고 5분 기다려라.”
 “그래야만 여자들이 히잡을 쓸 수 있다.”
    
 요르단에는 우편배달부가 없다. 하지만 나는 현지인 집에 갈 때마다 ‘우편배달부’가 된다. 
 영화 《우편배달부는 벨을 두 번 울린다(The Postman Always Rings Twice)》처럼, 나는 벨을 두 번 울리고 문 앞에서 5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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