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생 이비씨의 앞니를 가볍게 스치는 그것

자애로운 그분은 한 잔의 와인을 허하셨도다.

by 이비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혀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가 세 걸음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롤. 리. 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롤리타>


IMG_0057.JPG 동네 모노프리인데도 아예 따로 와인 코너가 구비돼 있다. 이렇게 많은 와인들이... 매일 나를 지나친다...ㅠㅠ


모든 일과를 끝 마친 저녁, 갓 완성된 저녁밥상을 앞에 두고 해 질 녘 빨갛게 물든 창밖을 내다본다. 테이블 위에는 해지는 하늘보다 더욱 진한, 그리고 더욱 빨간 와인이 담겨 있다. "쨍" 하고 와인잔이 자아내는 영롱한 파열음이 울려 퍼지고 가볍게 휘저은 와인을 입으로 가져간다. 마시는 듯 아닌 듯 와인을 살짝 머금고 향을 음미한다. 이어 목구멍을 넘어가는 감미로운 액체의 자취를 좇는다. 아... 이러다 알코올 의존증에 빠질지도 몰라...


'와인의 나라' 프랑스.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쳐서 될 손인가! 술을 잘하지는 못하지만 굉장히 즐기는 우리에게 프랑스에서 해야 할 제1의 미션, 최우선 순위의 위시리스트는 '와인'이었다. 사실 와인 애호가보단 음주 애호가로서 와인에 대해서는 잘 알지는 못한다. 심지어 호제(Rosé) 와인도 유학에 앞서 지난해 휴가차 프랑스에 놀러 왔을 때 처음 알았다. 그전까지는 후즈(레드. Rouge) 혹은 블랑(화이트. Blanc)이 있다는 것만 알았다. 심지어 샴파뉴(샴페인. Champagne)랑 블랑이랑은 구분도 못했다. 뭐랄까 소주 '처음처럼'과 '참이슬'의 차이 같은 걸로 알았달까? 쉽게 말해 와인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IMG_8448.JPG 보졸레누보 출시 기념 프로모시옹!!!


지금도 그닥 잘 아는 축에 속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전에 비해서는 조금 나아지지 않았을까 싶다. 4~5유로(원화로 5500~7000원 정도)하는 저렴한 것들만 축내지만 그래도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잘 먹는다'라고 하지 않던가. "아 이런 게 바디감이, 탄닌이 이런 걸까?!" 하는 눈은 좀 떠졌달까?


IMG_9426.JPG 매년 11월 셋째 주 목요일 출시 되는 '햇와인'과 같은 '보졸레누보(Beaujolais Nouveau)'. 약간 산뜻한 맛이 강한 게 가볍게 즐기기에 좋다. 물론 제일 싼 거지만


더군다나 짧게 보르도 와이너리 투어를 하면서 알게 된 것들도 있다. 같은 와인이라도 해도 생산연도별로 가격이 천차만별인데 그 해 수확한 포도의 질에 따라 와인 퀄리티가 결정되기 때문이란다. 그러면서 2015년에는 특히 포도가 잘 나왔기 때문에 이 해에 생산된 와인은 좋다고 했다(그 후로 우린 마트에서 2015년 빈티지 와인이 있으면 놓치지 않는다). 또 보르도도 다양한 지역으로 나뉜다. 예를 들어 메독(Medoc)이라는 지역이 있는데 이곳도 'Haut Medoc(높은 메독?)' 등 세분화된다. 이 역시 지역에 따라 생산되는 포도의 성질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레드 와인이라 해도 맛과 산도 등이 구분돼서 그렇단다. 또 같은 와인이어도 어느 시점에 만든 것이냐에 따라 등급이 나뉜다. 예를 들어 처음 생산된 것과 그다음으로 생산된 것, 또 보관 시간 등에 따라 한 종류의 와인이라도 레벨이 달라진다. 와인이란 것도 알면 알수록 어려운 녀석이다.


IMG_0986.JPG 지평선 저 멀리 퍼져 있는 포도밭.
IMG_9271.JPG 포도가 심어져 있는 줄 마다 앞에 심어진 장미. 예전에는 포도에 치명적인 곰팡이가 퍼지는지 알기 위해 장미를 이용했다고 한다. 장미가 시들거리면 위험신호!

보르도 만 해도 이런데, 더 상위 단계에서 레드, 화이트, 로제도 지역에 따라 나뉜다. 보르도와 부르고뉴(Bourgogne)가 레드로 유명하고(*우리가 흔히 버건디라 부르는 부르고뉴 와인! 한편 부르고뉴는 화이트 와인 샤르도네 품종으로도 유명하다) 샴파뉴 지역은 샴파뉴로 알려져 있다면, 화이트, 특히 리즐링 하면 역시 알자스(Alsace)다. 살짝 달달하면서도 레드에 비해 산뜻하고 가벼운 그 맛이 혀끝을 샤르르 감싼다. 개인적으로 오븐에 구운 연어나 올리브 오일 베이스의 파스타와 함께 화이트 와인을 즐기는 걸 애호한다. 아.. 지금도.. 하아...


IMG_3604.JPG 포도주가 가득 숙성 중. 한 통만 어떻게 안 될까요...??
IMG_7111 2.JPG 보르도 와인지도! 현지 필수 아이템.


로제 와인 하면 역시 프로방스. 지난해 마르세유를 필두로 프랑스 남부를 여행 갔었다. 이곳에서는 레드나 화이트보다도 로제가 더 많았다. 아마도 이 지역 주변에서 많은 로제 와인을 생산하기 때문이지 아닐까 싶다. 로제 와인은 레드와 화이트의 가운데에 있는, 그래서 어떤 면에서 왠지 정체성이 모호하다. 하지만 반대로 그래서 또 각자의 매력을 한 번에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거 같다. 레드는 부담스럽고 화이트는 조금 애매하다 싶을 때, 또 뭔가 "오늘은 좀 특별하고 싶어! 일상과 다른 순간을 만들고 싶달까?!" 하며 자아 도취감에 빠질 때는 호제가 제격인 거 같다. 투명한 분홍빛이 자아내는 분위기는 또 그대로 "C'est bon!(좋아!)"니까.


IMG_6310.JPG 호로제 사진이 없어서 대신 마르세유(Marseille)로... 저게 이프 섬(L'ile d'if)던가?


우리 부부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 중 하나는 술을 줄이자면서 줄이지 못한다는 거다. 아무리 싼 와인을 마신다 해도 티끌 모아 태산이고, 가랑비에 옷 젖고, 솟구치는 욕구에 따르다 보면 매월 월세를 제외한 지출의 절반 이상이 와인에 쏟아붓게 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한 번 코르크 마개를 "뽁!"하고 열고 나면서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그러다 보면 한 병이 되고 다시 새로 한 병을 깐다... 그렇다고 부어라 마셔라 죽어라!!!@.@!!! 하고 마시진 않지만 헤롱 거림이 일상이 되는 것에 적잖은 회의감도 든다.


IMG_9552.JPG 여기도 와인, 저기도 와인... 여기가 무릉도원이자 지상작원이자 한편으로 개미지옥...


"이러다 알코올 의존증 되겠어!"


이와 같은.


하지만 와인이라는 것은, 아니 술이라는 것은 왜 이리 매력적인 것인지... 살랑거리며 흔들거리게 만들며 약간의 자유와 해방감을 선사하는 그것... 의존증이 되고 싶진 않지만 이런 감정을 느끼기 위해 술에 의존하는 것은 사실인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나는 내 앞니를 살짝 스치며 흘러 들어오는 와인은, 내 삶의 빛이나 내 몸의 불을 때우는 연료로, 그리고 그 후에 작은 죄책감을 살짝 느끼는 시간을 갖고 싶다.


IMG_2067.JPG 결국 참지 못하고...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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