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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비 Nov 20. 2018

유학생 이비씨의 앞니를 가볍게 스치는 그것

자애로운 그분은 한 잔의 와인을 허하셨도다.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혀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가 세 걸음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롤. 리. 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롤리타>


동네 모노프리인데도 아예 따로 와인 코너가 구비돼 있다. 이렇게 많은 와인들이... 매일 나를 지나친다...ㅠㅠ


모든 일과를 끝 마친 저녁, 갓 완성된 저녁밥상을 앞에 두고 해 질 녘 빨갛게 물든 창밖을 내다본다. 테이블 위에는 해지는 하늘보다 더욱 진한, 그리고 더욱 빨간 와인이 담겨 있다. "쨍" 하고 와인잔이 자아내는 영롱한 파열음이 울려 퍼지고 가볍게 휘저은 와인을 입으로 가져간다. 마시는 듯 아닌 듯 와인을 살짝 머금고 향을 음미한다. 이어 목구멍을 넘어가는 감미로운 액체의 자취를 좇는다. 아... 이러다 알코올 의존증에 빠질지도 몰라...


'와인의 나라' 프랑스.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쳐서 될 손인가! 술을 잘하지는 못하지만 굉장히 즐기는 우리에게 프랑스에서 해야 할 제1의 미션, 최우선 순위의 위시리스트는 '와인'이었다. 사실 와인 애호가보단 음주 애호가로서 와인에 대해서는 잘 알지는 못한다. 심지어 호제(Rosé) 와인도 유학에 앞서 지난해 휴가차 프랑스에 놀러 왔을 때 처음 알았다. 그전까지는 후즈(레드.  Rouge) 혹은 블랑(화이트. Blanc)이 있다는 것만 알았다. 심지어 샴파뉴(샴페인. Champagne)랑 블랑이랑은 구분도 못했다. 뭐랄까 소주 '처음처럼'과 '참이슬'의 차이 같은 걸로 알았달까? 쉽게 말해 와인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보졸레누보 출시 기념 프로모시옹!!!


지금도 그닥 잘 아는 축에 속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전에 비해서는 조금 나아지지 않았을까 싶다. 4~5유로(원화로 5500~7000원 정도)하는 저렴한 것들만 축내지만 그래도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잘 먹는다'라고 하지 않던가. "아 이런 게 바디감이, 탄닌이 이런 걸까?!" 하는 눈은 좀 떠졌달까? 


매년 11월 셋째 주 목요일 출시 되는 '햇와인'과 같은 '보졸레누보(Beaujolais Nouveau)'. 약간 산뜻한 맛이 강한 게 가볍게 즐기기에 좋다. 물론 제일 싼 거지만


더군다나 짧게 보르도 와이너리 투어를 하면서 알게 된 것들도 있다. 같은 와인이라도 해도 생산연도별로 가격이 천차만별인데 그 해 수확한 포도의 질에 따라 와인 퀄리티가 결정되기 때문이란다. 그러면서 2015년에는 특히 포도가 잘 나왔기 때문에 이 해에 생산된 와인은 좋다고 했다(그 후로 우린 마트에서 2015년 빈티지 와인이 있으면 놓치지 않는다). 또 보르도도 다양한 지역으로 나뉜다. 예를 들어 메독(Medoc)이라는 지역이 있는데 이곳도 'Haut Medoc(높은 메독?)' 등 세분화된다. 이 역시 지역에 따라 생산되는 포도의 성질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레드 와인이라 해도 맛과 산도 등이 구분돼서 그렇단다. 또 같은 와인이어도 어느 시점에 만든 것이냐에 따라 등급이 나뉜다. 예를 들어 처음 생산된 것과 그다음으로 생산된 것, 또 보관 시간 등에 따라 한 종류의 와인이라도 레벨이 달라진다. 와인이란 것도 알면 알수록 어려운 녀석이다.


지평선 저 멀리 퍼져 있는 포도밭.
포도가 심어져 있는 줄 마다 앞에 심어진 장미. 예전에는 포도에 치명적인 곰팡이가 퍼지는지 알기 위해 장미를 이용했다고 한다. 장미가 시들거리면 위험신호!

보르도 만 해도 이런데, 더 상위 단계에서 레드, 화이트, 로제도 지역에 따라 나뉜다. 보르도와 부르고뉴(Bourgogne)가 레드로 유명하고(*우리가 흔히 버건디라 부르는 부르고뉴 와인! 한편 부르고뉴는 화이트 와인 샤르도네 품종으로도 유명하다) 샴파뉴 지역은 샴파뉴로 알려져 있다면, 화이트, 특히 리즐링 하면 역시 알자스(Alsace)다. 살짝 달달하면서도 레드에 비해 산뜻하고 가벼운 그 맛이 혀끝을 샤르르 감싼다. 개인적으로 오븐에 구운 연어나 올리브 오일 베이스의 파스타와 함께 화이트 와인을 즐기는 걸 애호한다. 아.. 지금도.. 하아...


포도주가 가득 숙성 중. 한 통만 어떻게 안 될까요...??
보르도 와인지도! 현지 필수 아이템.


로제 와인 하면 역시 프로방스. 지난해 마르세유를 필두로 프랑스 남부를 여행 갔었다. 이곳에서는 레드나 화이트보다도 로제가 더 많았다. 아마도 이 지역 주변에서 많은 로제 와인을 생산하기 때문이지 아닐까 싶다. 로제 와인은 레드와 화이트의 가운데에 있는, 그래서 어떤 면에서 왠지 정체성이 모호하다. 하지만 반대로 그래서 또 각자의 매력을 한 번에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거 같다. 레드는 부담스럽고 화이트는 조금 애매하다 싶을 때, 또 뭔가 "오늘은 좀 특별하고 싶어! 일상과 다른 순간을 만들고 싶달까?!" 하며 자아 도취감에 빠질 때는 호제가 제격인 거 같다. 투명한 분홍빛이 자아내는 분위기는 또 그대로 "C'est bon!(좋아!)"니까. 


호로제 사진이 없어서 대신 마르세유(Marseille)로... 저게 이프 섬(L'ile d'if)던가?


우리 부부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 중 하나는 술을 줄이자면서 줄이지 못한다는 거다. 아무리 싼 와인을 마신다 해도 티끌 모아 태산이고, 가랑비에 옷 젖고, 솟구치는 욕구에 따르다 보면 매월 월세를 제외한 지출의 절반 이상이 와인에 쏟아붓게 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한 번 코르크 마개를 "뽁!"하고 열고 나면서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그러다 보면 한 병이 되고 다시 새로 한 병을 깐다... 그렇다고 부어라 마셔라 죽어라!!!@.@!!! 하고 마시진 않지만 헤롱 거림이 일상이 되는 것에 적잖은 회의감도 든다. 


여기도 와인, 저기도 와인... 여기가 무릉도원이자 지상작원이자 한편으로 개미지옥...


"이러다 알코올 의존증 되겠어!"


이와 같은.


하지만 와인이라는 것은, 아니 술이라는 것은 왜 이리 매력적인 것인지... 살랑거리며 흔들거리게 만들며 약간의 자유와 해방감을 선사하는 그것... 의존증이 되고 싶진 않지만 이런 감정을 느끼기 위해 술에 의존하는 것은 사실인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나는 내 앞니를 살짝 스치며 흘러 들어오는 와인은, 내 삶의 빛이나 내 몸의 불을 때우는 연료로, 그리고 그 후에 작은 죄책감을 살짝 느끼는 시간을 갖고 싶다.


결국 참지 못하고...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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