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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비 Nov 05. 2018

유학생 이비씨, 황금광 시대에 입장하다

황금광 시대.

저도 모를 사이에 구보의 입술엔 무거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황금을 찾아, 그것도 역시 숨김없는 인생의 분명한 일면이다. 그것은 적어도 한 손에 단장과 또 한 손에 공책을 들고, 목적 없이 거리로 나온 자기보다는 좀 더 절실한 인생이었을지도 모른다. (중략) 시시각각으로 사람들은 졸부가 되고 또 몰락하여 갔다. 황금광 시대, 그들 중에는 평론가와 시인, 이러한 문인조차 끼어 있었다.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항상 사람들로 북적이는 백화점 라파예트(Lafayette). 찬란하다 못해 어지럽다.


완전히 낯선 곳에 정착하는 것은 굉장히 까다롭다. 뿌리를 내리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몇 년은 있겠다는 것만으로도 넘어야 할 것이 많다. 


그중 가장 기본적인 것은  역시, 먹고 자고 소비하는 생활의 기반을 갖추는 것이다. 지금까지 봤을 때 프랑스 생활의 가장 기본은 은행 계좌다. 이 과정은 약간 아니러니 한데 이를 겪다 보면 "역시 기본이 가장 어렵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은행 계좌를 만드는 데 겪는 짜증은 집을 구하는 것과 관련 있다. 프랑스에서 은행 계좌를 만들기 위해서는 "나 여기 살고 있어요"를 증명해야 한다. 본인 명의로 된 전기세 고지서나 집 보험 증명서, 혹은 내가 거주하는 집의 주인이 "이 사람 여기 살아요"라고 해줘야 한다. 또 내가 살고 있는 지역 안에서만 계좌를 열 수 있다. 이렇게 계좌를 연 은행은 내 주거래 은행이 된다. 큰 금액을 인출하거나 은행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면 주거래 은행으로 가야 한다. 서울로 예를 들면 종로구에 살고 있으면 종로구에 있는 은행에 가야 한다. 서대문구나 은평구, 양천구에서는 계좌를 만들 수 없다. 프랑스에서 은행 계좌를 열기 위해서는 '서류 상' 어딘가에 살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집을 구하기 위해서는 은행 계좌가 있어야 한다. 집을 사지 않는 이상 월세로 살게 된다. 입장을 바꿔 내가 집주인이라도 은행 계좌도 없는, 즉 월세를 낼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사람에게 집을 쉬이 내주지 않을 것이다. 혹시라도 집을 사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프랑스에서 집을 구하기 위해서는 약 1년 치에 해당하는 월세를 은행에 묶어 두거나, 월세의 세 배 이상을 버는 사람이 보증을 서줘야 한다. 일부 집주인들은 외국인 보증인도 받아준다고 하지만 대부분은 그나마 믿을 수 있는 프랑스인 보증인을 선호한다. 프랑스인 보증도 없는 데다 금전거래를 위한 은행 계좌도 없는 외국인, 누가 받아 줄까?


또 다른 백화점인 봉 마르셰( Bon maché)에 진열돼 있는 각양각색의 생수들. 때론 크리스탈보다 반짝이는 무색무취의 것들. 수많은 봉이 김선달들.


여기서 엉킨 실타래처럼 꼬인다. 은행 계좌를 만들기 위해서는 집이 필요한데, 집을 구하기 위해서는 은행 계좌가 있어야 한다.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 같은 난감한 상황에 빠진다. 하지만 이곳 역시 사람 사는 곳, 나름의 방법은 있다. 지인의 지인의 지인의 누군가든 프랑스 현지에서 거주하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그 사람이 "이 사람은 우리 집에 집에 살고 있어요"하면 계좌 계설을 위한 거주증명의 난문을 넘을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위장전입 아닌 위장전입 같다고 할까? 절차상 불가피한 과정이다 보니 은행에서도 실제로 그곳에서 살고 있는지 따지고 들지는 않는 듯하다. 다만 이때는 그 지인이 전기세 고지서나 집 보험 등을 챙겨야 하며, 은행 계좌 역시 그 지인의 거주지(서류 상 내가 사는 지역이기 때문에)에서 만들어야 한다. 나중에 다른 지역에서 살게 되면 그 동네 은행에서 주거래 은행을 바꿔야 한다.


또 다른 방법은 집 가계약서를 들고 가는 것이다. 일부 부동산은 외국인을 전문적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이 역시 세분화되어 있어 일본인과 한국인 등 아시아인들을 주로 다루는 곳도 있다. 이런 부동산에서 취급하는 집들은 외국인이어도 집을 내어줄 용이가 어느 정도 있다고 볼 수 있다. 집주인들도 앞서 외국인 세입자를 받아 본 적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부동산과 집주인 모두 계좌 개설과 집 구하기의 꼬리를 무는 난제를 잘 알고 있다. 집을 내어주기로 한 이상 이들 입장에서는 예비 세입자가 은행 계좌를 빨리 만드는 게 낫다. 그래야 집주인은 월세를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고 부동산은 수수료를 받을 수 있다. 이렇게 가계약서 작성한 뒤 이를 들고 은행을 가면 된다. 그리고 나면 진짜 집 계약을 맺는다. 


난 잘 가고 있나? 쏘 공원(Parc de Sceaux)의 풍경.


돌이켜보면 드디어 프랑스에 첫 발을 디뎠구나 하는 순간은 내 손에 은행 계좌가 들어왔을 때다. 아무리 집을 가계약했다 한들 확실히 도장을 찍기 위해서는 돈을 주고받는 통로가 있어야 한다. 결국 돈이다. 프랑스에서는 최종적으로 은행 계좌를 여는 데 대략 2주일 정도 걸린다. 계좌 개설이 완료되고 은행카드와 수표책(프랑스는 아직 수표를 많이 쓴다)을 받고, 집 계약을 마무리한 그때, 이제 시작이다 싶었다.


한 사회에 정착하는 것의 시작은 그 나라의 장기 비자를 받거나, 그 나라에 입국하는 것 혹은 그 나라의 말을 배우는 것 등과는 전혀 상관없었다. 우리 발 딛고 사는 '황금광 시대'에서 문제없이 돈거래를 할 수 있냐는 것, 그것이 진짜 시작이었다. 그때가 돼야 이 사회는 낯선 외국인에게 "그래 들어와 봐"하고 문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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