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비 Nov 08. 2018

유학생 이비씨의 운수 좋은 날...이었을까?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현진건 <운수 좋은 날>


프랑스 서퍼들의 천국이라는 '비아리츠(Biarritz)'. 지중해와 달리 거칠고 투박하면서도 광활한 바다는 "나 바 다. 나 대 자 연"이라고 외치는 듯하다.


나이 서른 넘어 직장을 때려치우고 타지에서 생활하는 유학생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알뜰한 경제관념'이다. "아직은... 괜찮지!" 하면서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기는 더욱 어려워지고 나름 모아둔 돈이 있으면 "새로운 삶을 사는 건데 이 정도는 괜찮지!" 하며 지름신이 강림하기 십상이다. 그렇게 어영부영 지나다 보면 1년 예상 생활비는 반년도 되지 않아 통장에서 빠져나가고 만다.


"이제 여행도 없고 외식도 없다!"


프랑스 유학이라는 마치 쇼콜라처럼 달달한 맛에 빠졌던 정신을 제 궤도로 되돌려야만 했다. '와인의 나라'에 와서 매주 3~4병(그래 봤자 싸구려지만)씩 마셨던 와인도 대폭 줄이고, 낭만과 로망이 가득한 유럽 대륙 탐방도 일체 중단했다. 여기 있을 때 즐기자는 마음은 변함없지만 정신줄 놓고 있다 보면 '생활'이 되지 않을 판이었다.


문제는 돈 나가는 구멍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물론 여행은 한 번에 가장 많은 돈이 빠져나가는 어마 무시한 블랙홀이다. 이것만 줄여도 큰 보탬이 되긴 하지만 생활을 유지하는 데 가장 큰 적은 내부에 있었다. 바로 생활 그 자체다.


와인의 홈그라운드와도 같은 보르도(Bordeaux)의 주요 관광지 중 하나인 '물의 거울(Le miroir d'eau)'. 얇게 고인 물에 비친 야경.


얼마 전 화장실 휴지가 다 떨어졌다. 운 좋게도 집 근처 모노프리(MONOPRIX. 프랑스 대형 마트)에서 휴지 할인행사를 하고 있었다. 평소에 사는 6개 들이 보다 싼 가격에, 그것도 2개나 더 많은 8개 들이를 '득템'할 수 있었다. 속으로 "나이스!"를 외쳤다. 휴지란 녀석은 둘둘 잘도 풀리는 것이 금방 동난다. 별생각 없이 지내다 보면 매일 아침 위기(?)에 봉착하기도 한다. 더군다나 거의 매일 모노프리를 들낙거렸지만 휴지 프로모션은 본 적이 없었다. 마치 가는 날이 장날인 것처럼 느껴졌다.


모노프리에서 날라온 쿠폰 묶음... 아... 제발 이러지 마세요... 너무 고맙단 말이에요...ㅠㅠ 이미 세 개나 썼다고요...ㅠㅠ


하지만 웬걸, 휴지를 사 오자마자 빨래 세제와 주방 세제, 바디워셔와 샴푸가 한꺼번에 다 떨어졌다.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마리 앙투아네트가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고 했듯(사실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바디용품이 없으면 비누라도 쓰면 되지만 빨래 세제와 주방 세제는 21세기에서는 사실상 대체 불가한, 결국 사야만 하는 그런 것들이었다. 가볍디 가벼운 휴지 묶음을 들고 "룰루랄라~" 거리며 왠지 이날 따라 운이 좋다 싶었다. 다시 지갑을 열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이렇게 자꾸 돈 쓰면 안 되는데... 그래도 공부는 해야 하니까...?


그래 봤자 얼마겠나 싶을 수 있다. 하지만 마치 잔치 국수 한 그릇에 만족스러운 포만감을 느끼다 두어 시간 만에 급격히 공복을 느끼는 것처럼, "이 정도면 충분해!" 하다가 급속도로 빠져나간 잔액에 충격을 받은 유학생에게 갑자기 닥쳐온 생활의 습격은 어마 어마했다. 설상가상으로 마트를 돌아다니며 가격을 비교해 몇 센트라도 아끼며 온갖 세제들을 충당하자마자 또다시 식용유와 소금 등 최저 생활 유지를 위한 기본 물품마저 다 떨어졌다면? 그야말로 "장독대에 구멍 났다는 게 이런 걸까...?" 싶다. 결국 프랑스 오고 난 뒤 가장 많은 카드 내역서를 받고 말았다.. 


예전에 회사를 다닐 때 가장 많은 들은 말이지만 한편으론 제일 이해가 안 됐던 것 중 하나가. "먹고살아야지. 생활이 제일 무섭다"라는 식의 말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래 봤자 얼마나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아마도 갓 돈을 벌며 스스로 '생활'하기보다는 그동안 미뤄왔던 소소한 즐거움을 더 즐겼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예를 들어 호주산이라도 과감하게 소고기 한 점 구워 먹거나, 냅다 최신 노트북을 지르는 게 더 중요했던 그런. 하지만 이제 나와 아내, 그리고 스스로 생활을 유지해야 하는 입장에 다시 놓이다 보니 너무나 절실히 공감하게 된다. 생활이 제일 무섭다. 돈은 괜히 나가는 게 아니다. 


이럴 때가 아니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 잔만...! 날씨 좋은 어느 날 세느(La Seine) 강변에서.

매거진의 이전글 유학생 이비씨, 황금광 시대에 입장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