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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비 Nov 10. 2018

이씨, 거 농담이 심한 거 아니오.

차별과 농담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트로츠키 만세.

-밀란 쿤데라 <농담>


집에서 본 해질녁 바같 풍경. 빨강 주황의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 앞의 고층 건물들이 없다면 얼마나 더 좋을까 싶지만 옛 현인은 "달이 밝은 것은 그림자가 있기 때문"이라 했다지.


언어와 문화는 물론 일상의 대화에서 세밀한 사랑의 방식까지 모든 면에서 차이가 있는 낯선 곳에 산다는 것은 때론 그 자체로 농담 같은 일이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때때로 찾아오는 '이질감'은 떨칠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이제는 일상이 되어 아무런 감흥이 없는 동네 골목길을 걷다가 새빨간 탄산수 병을 들고 조깅을 하는 누군가를 보며 "아 나 지금 파리에 있지"하고 느끼는 감정. 문득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 자체가 얼마나 생경한 농담 같은 일들인지 되새기는 것 말이다.


농담 같은 상황,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갑자기 구분하기 어려워지는 순간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한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져도 아무렇지 않은 듯, 혹은 만만한 이방인이 아니라고 괜히 더 강한 척 대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뻔뻔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이런 식으로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긴장감 1000%에 달하면 크게 두 가지 형태의 부작용이 나타난다. 하나는 능숙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나머지 주워 담을 수 없는, 순간 분위기를 더욱 악화시키는 일을 저지를 수 있다. 또 다른 부작용은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되레 여유를 잃고 모든 상황에 짐짓 진지해져 퇴각로를 스스로 불 지르는 일이 그렇다. 


예를 들어, 마치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결국 그 나라가 그 나라 아니냐 와 같은 농담으로 아이스 브레이킹을 하려다 더욱 빙하기로 접어들거나, 누군가가 "너 북한에서 왔니? ㅋㅋ"라는 유머에 되레 달려들다 수습하지 못하거나. 마치 소설 속 주인공이 별생각 없이 혹은 젊음의 패기로 발화해버리는 농담이 본인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해석되고 처절한 사상검증을 거치는 것처럼. 그로 인해 회복할 수 없는 길로 들어서고 그 후 또 다른 누군가는 자살을 하기 위해 약을 들이켰지만 하필이면 변비약을 먹어 화장실에서 모든 것을 쏟아내는 농담 같은 상황에 놓이는 것처럼.


앙티브(Antibes) 놀러 갔다가 어느 해변가 끝에서 만난 거대 외톨이. 넌 뭘 그렇게 생각하니? 덩치값 못하게.


그렇다고 모든 상황 악화를 극에 달한 나의 태도 탓으로 돌리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있다. 농담이라는 것이 유머로서 효과를 발휘하려면 어느 정도는 현실성에 기반해야 한다. 적정 선에서 그럴듯한 현실감과 "오 이것 봐라"하게 만들면서 오버하지 않는 센스, 이 절묘한 조합이 궁극의 농담을 만든다. 농담의 특성 자체가 그렇다 보니 만약 상대가 그 조합의 균형을 잡지 못할 경우 이는 1000%에 달한 나의 긴장감을 터뜨려버리는 스위치가 된다. 낯선 곳에 살아가는 낯선 존재로서 나는 이미 모든 것에 즉각 반응하기 위한 센서를 최대치로 켜 둔 상태다.


한 친구가 일부 아시안들은 "D'accord"와 "Tacos" 발음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농담을 한다. 상대에게 악의는 전혀 없고 이를 두고 재밌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단순한 농담일까 아니면 선을 넘어선 걸까? 혹은 길을 지나가는데 갑자기 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쏟아낸 그(아마도 프랑스인)는 농담을 한 걸까 아니면 그 이상인 걸까? 이 모든 것에 나의 긴장감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막상 그 순간에 놓이면 매 순간이 프랑스어 시험지 같다. 


낯선 곳에 살아간다는 것은 이에 적응하는 단계를 거치는 것과도 같다. 때로는 가벼운 농담으로 넘겨버릴 여유를 갖춰야 하며 때로는 더욱 차갑게 얼어붙게 만들 수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어느 정도 그 수준에 달했다고 스스로 느끼더라도 나의 긴장감은 여전히 1000%에 달한다는 것이다. 난 여전히 이방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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