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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비 Dec 28. 2018

내 진심이 그녀에게 닿지 않을 때

우리는 왜 파리까지 와서 싸울까?

부부가 된다는 것은 관계에 많은 변화를 가져온다. 우선 법적인 것에서부터 사회적인 부분까지 더 많은 책임감을 갖게 된다. 물론 둘이 함께하는 시간과 식사자리도 더 많아진다. 더군다나 우리처럼 부부 동반 유학에 떠났다면 더 그럴 것이다. 공부도 같이하고 장도 같이 본다. 왜냐면 기본적으로 시간이 많으니까(이건 어쩌면 우리가 게을러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는 자기반성을 하게 된다). 24/7을 거의 붙어 있다시피 한다.


여기에 약간 모순적인 게 있다. 서로가 공유하는 부분이 많아질수록 의외로 갈등의 빈도도 많아진다. 특히 우리처럼 거의 같은 목표와 단계를 밟고 있는 상황일수록 더욱 그렇지 않을까 싶다. 예를 들어, 이곳에서 우리의 삶의 궤적은 거의 같다. 둘 다 어학을 공부하고 있고 대학원을 준비 중이다. 심지어 아르바이트도 같은 곳에서 한다. 전공 등 디테일한 부분에선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골격은 같다. 그 이야기인즉슨, 이곳에서는 우리가 좋든 싫든 어쩔 수 없이, 혹은 불가피하게 각자의 삶을 너무 잘 알게 되면서 가끔은 지나치게 깊게 개입한다는 거다.


스트라스부르의 한적한 길거리.


한국에서는 둘 사이에 일정한 공간이 있었다. 서울과 부산이라는 장거리 연애에다 각자의 직장도 달랐다. 직군도 아예 다르다 보니 어떻게 보면 상대의 영역에는 거의 무지했다. 생활공간이 다르고 직장도 다르면서 각자의 친구들도 있었다. 물론 서로 힘든 일이 있고 짜증 나는 일이 있으면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같이 화도 내고 위로도 해준다. 하지만 그 수준은 “진짜 너무 하네! 괜찮아 잘 될 거야. 그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야!” 같은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종종 이런 위로와 공유가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여기서 많은 힘을 얻는다. 왜냐면 상대가 비록 상황이나 맥락을 정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게 그 사람이 해줄 수 있는 최선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곳에서의 삶은 조금 다르다. 너무나 정확히 서로의 상황을 알기 때문에 오히려 더 상처 받기 쉽다. 반대로 기운을 받는 것은 더 어렵다. 각자의 프랑스어 실력이 어느 정도이고 그에 맞춰 시험은 언제 어떤 식으로 준비할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어떤 트러블이 있고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도 다 안다. 그런데 이는 기본적으로 당신의 문제이지만 곧 내가 고민해야 할 현실적인 문제가 된다. 나 역시 그 한복판에 있으니까. 내가 겪는 이 지루한 과정을 조만간 당신도 치러야 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의도치 않게 ‘조언’이 ‘간섭’처럼 보이기 십상이다. 더군다나 어줍잖은 위안의 말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상대가 문제의 상황을 잘 아는 만큼 더 ‘디테일’하고 ‘현실적’인 도움을 ‘반복’해주길 바라게 되니깐. 이런 부분들이 부족해질 경우 갈등의 스파크가 일고 이는 오해와 왜곡을 낳는다.


“내가 무슨 대답을 할 수 있겠어?”

“무슨 답을 바란 게 아니야.”


최근 아내는 프랑스어 시험을 앞두고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대학원 진학 준비와 겹치면서 시험 준비에 매진하지 못했다. 좋은 점수를 받는 것보단 시험 패스 여부가 더 중요하다 보니 “그래도 통과는 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혹시 원하는 결과가 안 나온다 해도 “괜찮아! 다시 보면 되지!”라며 마음 다독였다. 하지만 하루 이틀 시험날이 다가올수록 그녀의 스트레스 지수는 급격히 치솟았다. 째깍째깍 시간이 흐를 때마다 그녀의 한숨 빈도도 늘었다.


어차피 될지 안 될지 알 수도 없는 건데 왜 벌써부터 고민하며 스트레스를 받을까? 물론 나 역시 앞선 걱정이 많은 사람이라 그녀의 불안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사실 그녀가 아니었다. 오히려 나 자신이 문제였다. 시험 스트레스를 받는 그녀에게서 갑자기 내가 보였다. 우리 모두가 가장 확신하는 것 중 하나는 그녀의 프랑스어 실력이 나보다 훨씬 좋다는 거다. 그녀는 이미 이번에 보는 시험의 전 단계를 패스했다. 그에 비해 나는? 가장 기초 레벨도 없다. 조만간 1월에 시험을 볼 예정이긴 한데, 나 역시 시험 준비는 하나도 되지 않았다. 핑계를 대자면 길어진 영어 공부와 대학원 진학 준비 등으로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그렇게 나를 위로해 왔다.


스트라스부르에서 마주친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


그녀의 불안이 나의 안일함을 건드렸다. 그녀마저 시험을 앞두고 이렇게 걱정을 하는데 나는 너무 태만한 거 아닐까? 정말 자신 있어? 너무 여유로운 거 아냐? 오히려 더 급한 사람이 누구인데? 등등. 그러면서 스스로가 너무 부끄럽고 자신에게 짜증이 났다. 시험 전날 한숨을 쉬는 그녀에게 “괜찮아 잘할 거야! 왜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지?”하는 건 사실 나 자신에게 한 말. ‘나도 잘할 수 있을 거야' 같은. 지금 그녀의 문제는 곧 나의 것이 될 테니까.


하지만  나도 모르게 내 말에 날카로움이 스며들었나 보다. 그녀 입장에선 내게서 기대한 ‘디테일’한 위로가 그저 채근하는 것으로 보인 듯했다. 어떤 상황이고 무엇이 어려운지 아는 사람에게는 한편으로 더 큰 기대를 품게 되니깐. 더군다나 그 상대가 부부라면 작은 차이도 더 크게 느껴질 터였다.


“갑자기 괜찮아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왜 불안해하냐고 물으면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나도 살짝 당황했다. 그녀에게 뭐라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걱정을 하면서 그녀는 물론 나 자신에게 “괜찮아”라고 말하려고 했다. 근데 갑자기 궁지에 몰린 듯했다. 그런 게 아닌데…


다행히 그녀의 시험은 잘 끝났다. 이때의 미묘한 긴장도 일단은 이어진 침묵으로 해소된 듯 보인다. 하지만 대학원 진학과 시험 준비 등 ‘같이’ 해야 할 것들이 늘어나면서 우리는 가끔 생각 못한 서로의 모습을 보곤 한다. 크진 않지만 자잘한 마찰음, 미묘한 어감과 어투의 차이. 우린 너무 많은 걸 같이 해야 하는 상황에 있으면서 서로를 더 잘 이해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그렇기 때문에 더 날카로워지고 기대도 커진다. 가끔 우리는 그러한 기대치를 알면서도 모른 체 하기도 한다. 당장 같은 문제로 나 역시 스트레스를 받고 있으니까. 또 우리는 상대를 보고는 자신을 떠올린다. 이때 화살의 방향은 '나'를 향하지만 내 앞의 상대는 그것이 자기를 향하고 있다고 오해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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