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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영 Dec 30. 2018

싸우는 게 아니라 서로 이해하려는 거예요

커뮤니케이션의 이해

우리는 좀처럼 싸우지 않는 커플이었다. 그것이 우리 연애의 자랑거리이기도 했다. 남자친구가 워낙 착해서 절대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 없고, 내 얘기를 잘 들어줘. 서로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참고 넘어가지 않고 얘기를 다 해. 커뮤니케이션의 이해 측면에서 우린 모범이 될 법했다.

8년의 연애 후 결혼을 했다. 그리고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 그에게서 다른 모습을 본다. 아니, 이미 알고 있었던 면이지만 내가 축소해서 보았거나, 일상에서 자주 겪지 않아서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던 부분이다.

그는 따뜻함이 몸에 밴 사람이 아니다. 여기서 따뜻함이란 드러나는 친절함, 사회적인 표현을 통해 느끼게 되는 온도다. 그는 본성이 착하고 여린 사람이다. 하지만 타인에게 표현하고 공감을 나타내는 것에 능숙한 사람이 아니다. 그 동안 그를 만나오면서 이런 점을 알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가끔 그의 그런 면에 놀란다. 나를 향해 내뱉는 말투가 평소보다 차가울 때, 나에게든 타인에게든 호의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 때, 나는 마음이 틀어지고 그를 꼬집는다.

그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것은 오해다. 그는 전혀 차가운 마음으로 한 말이 아니었고, 자기 자신을 향한 말이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서, 호의나 미안함의 표현이 되레 지나친 것이 될까봐 그러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안다. 그의 따뜻한 마음을. 그럼에도 들려오는 말에서, 눈에 보이는 행동과 표현방식에서 난 ‘왜 이만큼 하지 않는거지-‘하고 나의 잣대를 들이댄다.



(아마도 자칭) 크리스마스의 수도, 스트라스부르


크리스마스 바캉스를 맞아 스트라스부르와 콜마르에 놀러갔다. 콜마르에서, 남편이 좋아할 만한 족발 요리를 하는 식당을 찾았다. 요즘 우린 또 한창 긴축재정 상황이라 잔고를 계산해가며 여행중이었는데, 그래도 모처럼 맛있는 것 먹으러 갔으니 와인도 주문했다. 여느 브라서리보다 얇고 큰 와인잔이 제공되기에 - 보통 카페/바/브라서리에서 잔 단위로 와인을 주문하면 대체로 좀 뭉툭하고 단단해보이는 와인잔에 와인을 담아준다 - 역시 레스토랑이라며 좋아라 했다.

우리는 전식과 본식이 세트로 구성된 포뮬을 주문했다. 나는 채소수프를, 남편은 뮌스터 치즈가 든 샐러드를 엉트레로 골랐다. 토마토나 양파 베이스의 맑은 수프일 거라 생각하고 채소수프를 고른 것이었는데 직원이 가져다준 수프는 크림이 많이 들어 뻑뻑한 수프였다. 남편의 입맛에 잘 맞을 스타일이었다. 남편은 종종 팔을 뻗어 빵에 수프를 적셔다 먹었다. 샐러드랑 수프랑 바꿔먹자고 제안했지만 그는 괜찮다며, 자기 샐러드도 맛있다며 접시를 바꾸지 않았다.


나의 수프, 그의 샐러드, 나의 본식이었던 알자스 스타일 동그랑땡


수프를 다 먹고, 남편이 마지막으로 수프 그릇을 빵으로 야무지게 닦아먹는 가운데 그의 팔이 와인잔을 날려버렸다. 와인잔은 테이블 아래로 경쾌하게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 마침 주변에 있던 직원이 잽싸게 와서 맨손으로 잔 조각을 주워담았다.
“빠흐동, 누쏨데졸레 마담...” (죄송해요...)
진심으로 미안함을 느꼈다. 손님이 많은 식당이었다. 우린 2층에 있었는데 직원 둘이 1층과 2층을 왔다갔다 하느라 바빴다. 심지어 우리가 잔을 깨기 바로 얼마 전, 한 직원이 다른 테이블에 서빙할 에스까르고를 들고 계단을 바삐 올라오다 넘어져 팔을 다치고 다른 직원이 날아간 달팽이와 접시 등을 치운 상황이었다. 우린 그 계단 앞에 앉아있었다.

그 뒷수습을 하던 직원이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수습을 해주었다. 잔이 깨지자 마자 맨손으로, 그 다음엔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가져와서, 또 그 다음엔 대걸레를 가져와서 치웠다. 그녀가 빗자루로 바닥을 쓰는 동안 난 다시 “빠흐동”을 했고 그녀는 괜찮다며 우리에게 신발이나 가방 등 바닥쪽을 주의하라고 했다. 대걸레로 바닥을 닦고 난 뒤 바닥 미끄러울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해주었을 때에는 한번 더 “브레멍데졸레”라고 했다. 그녀는 또 쎄빠그라브, 완전 괜찮다고 대답했다. 한편 남편은 잔이 깨지자마자 직원이 달려왔을 때에만 미안함을 표시하고 두번째, 세번째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문득 화가 일었다. 왜 정작 잔을 깬 애는 미안해하지 않는데 내가 미안해하고 있는 건가.


왜 미안하다고 안 해?


그리고 우리식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소리치며 얼굴 찌푸리며 싸운 적이 없지만, 이런 게 싸움이라면 싸움이겠구나 싶은 대화. 서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 감정적으로 어긋난 부분을 맞추어보고 이해하기 위해 나누는, 마음이 무거운 대화. 

이번에도 그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처음에 이미 미안하다고 표현을 했고 직원이 괜찮다고 했는데 굳이 왜 또 표현을 해야 하는가. 직원은 자기 일을 하는 것인데 옆에서 자꾸 미안하다고 하면 오히려 직원의 마음이 불편할 것 같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둘 다 지금 식당 서빙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으니 직원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수 있었다. 그의 입장은, 빨리 깨진 자리를 치워두는 것이 중요한데 옆에서 그럴 때마다 미안하다고 하면 도리어 성가실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내 입장에선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해주는 손님이 좋았다.
“나는 내가 잔 치우는 동안 쳐다보지 않고 아무 말도 안하는 손님보다, 한 마디 더 해주고 신경 써주는 손님이 좋아.”

그러나 우리의 대화는 더 깊이 더 멀리 나아갔다. 얘기 끝에 나온 그의 말이 내게 무겁게 와닿았다.


너는 무엇을 하든지 네 기준이 있어. 그리고 그 기준이랑 다르면 그게 약간 문제라는 식의 느낌을 줘.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게 됐을 거리를 하나하나 돌이켜보았다.

“아냐, 전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아! 다른 게 당연하지! 다만 우리 둘이 생활 방식에서 다른 부분이 있을 때 내 방식으로 기울게 되긴 하지만... 그건 그냥 서로 맞추는 거잖아.”
“먹는 거로 얘기하는 건... 내가 은연중에 너의 건강(과 체중)을 관리하려고 드는 것 같아. 근데... 나도 몇 번 참고 나름 정제해서 얘기하는 거긴 해.”

우린 나즈막한 목소리로 각자의 입장을 얘기했고, 서운했을 만한 지점을 다시금 떠올리며 미안함을 느꼈고, 의도를 설득해가며,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본식까지 다 먹었다. 그러고는 즐거운 오후를 보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배경 모티브가 되었다는 콜마르. 아침에 안개가 자욱히 껴서 신비로웠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무척 좋아한다. - 나와 남편의 공통된 취향이기도 하다. 감명깊게 읽은 책을 꼽아본다면 둘 다 이 작품을 떠올린다. - 주인공이 엄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은 것은 이후 벌어지는 일들의 귀책사유가 된다. 인간의 복잡다단한 감정이 어떻게 눈물로 획일화될 수 있단 말인지.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이 약속된 인간성인 것마냥 타인을 판단하고 본질을 들여다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난 겉으로 보이는 것의 이면을 들추고 본질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 작품의 시선이 좋았고 그런 시선을 가져야 한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문득, 나도 그에게 그런 강요된 표현을 요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꼭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한번 더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나? 당신에게 공감하고 있다는 것을 말로 표현을 해야 하나? 말투를 꼭 다정하게 해야 마음도 다정하다는 건가? 그냥 사회적인 약속과 가면들 아닌지.

이 생각은 아직 잘 정돈이 되지 않는다. 이면을 들여다볼 줄 알고 본질에 집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만, 그와 별개로 상대방에게 가 닿을 수 있게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사람들과 공감을 주고 받고 싶다. 나는 진심으로 미안하니까 그 미안함을 제대로 표현하고 싶고, 나에게 다가오는 말투가 평소만큼 따뜻하지 않다면 그 화자의 마음이 지금 따뜻하지 않구나 생각하게 된다.






이 글을 쓰면서도 생각한다. 그는 사회적인 친절함이 몸에 밴 사람이 아니라고 나는 어떻게 단언하고 있나. 여기에 또 나의 잣대를 하나 들이댄 것이다. 한 사람을 사랑하고 부부라는 관계를 맺으면서, 우리 관계를 통해 나를 끊임없이 돌이켜본다. 우리 사이 커뮤니케이션을 이해하는 것은 결국 너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나에 대한 성찰이란 걸 계속 떠올리는 요즘이다.



* 이 글은 남편의 이전 글 <내 진심이 그녀에게 닿지 않을 때> 에 이어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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