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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영 Dec 20. 2018

매일 얼굴 보더라도 가끔은 편지를 써

결혼기념일 맞이 우리의 편지 연애사

프랑스에 와서 첫 결혼기념일을 맞게 됐다. 그가 공부하러 간 사이, 그에게 쓸 카드를 사러 갔다. 카드나 편지지를 고르는 것은 은근히 마음 들뜨는 일이다. 몰래 편지를 쓰는 설렘, 편지를 받아 읽고 기뻐할 그의 모습에 대한 기대 때문에. 생각해보니 프랑스에 오고서 그에게 처음 쓰는 편지였다. 편지를 쓰는 동안 이 시간과 공간을 함께 기억하고 싶어서, 2018년 12월 파리임을 카드에 꾹꾹 새겼다.


우리는 서로에게 종종 편지를 써왔다.

연애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그는 꽃과 함께 편지를 건네왔다. 글씨가 초등학생같아서 보자마자 웃음이 나고, 내용마저 맑은 편지였다. 편지를 받으면 으레 답장을 보냈다. 그러면 얼마 안 가 또 답장을 받았다. 시간은 잘도 흘러서 어느 때는 각자의 생일이었고, 어느 땐 크리스마스였고, 어느 땐 발렌타인데이였고(내가 초콜릿을 좋아하니까 이 날은 꼭 챙겼다), 어느 땐 기념일이었다. 그는 색지를 오리고 붙여 못생겼지만 감동적인 편지지를 만들기도 했고, 핀란드에 머물던 시절 병에 넣은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편지를 주고 받는 횟수는 확실히 줄어들었고 편지지가 작은 카드가 될 때가 많아졌지만, 우린 편지쓰기를 놓지 않았다.


학원갔다가 아뜰리에 수업도 듣고 오겠다던 그가, 집에 들어오는데 백화점식품점의 쇼핑백을 손에 들고 있었다. "아뜰리에 간다더니 백화점 간 거였구나!" 그가 사온 것은 어드벤트 캘린더였다. 12월 1일부터 크리스마스까지 하루씩 날짜를 뜯어 그 안에 든 초콜릿/캔디류를 먹으며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나라면 24일치 한꺼번에 뜯고 싶을 것 같은 재미있는 과자상자다. 마트에 가면 여러 회사에서 나온 귀여운 제품들이 많아 재미있게 구경을 하곤 말았었다. 그는 원래 초콜릿전문점에 가서 하나를 구해보려고 했으나 팔지 않더라며, 어쩔 수 없이 봉막셰(Bon marché)의 식품점에서 샀다고 했다. "아냐아냐, 너무너무 좋아! 근데 난 선물 준비하지 않았단 말이야!" 신나하며 그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편지가 없었다. 편지를 안 썼다니!


1일 바로 뜯기. 오늘은 19일인데 난 이미 20일을 뜯었다.


잠깐 실망할 뻔했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이 선물을 사러 이 가게 저 가게 돌아다니며 나와 같이 기대하고 설렜을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으니까. 그렇지만 내일 편지를 써서 달라고 했다. ㅎㅎㅎ 그리고 그는 제법 큰 카드에 깨알같은 글씨를 빼곡히 담아 답장을 주었다. 원래 9월에 크로아티아에 가게 되면 그 때 써주려고 미리 사두었던 카드란다.(9월에 크로아티아에 갈까 생각하다 가지 않았다.) 편지를 읽다가 우리의 지난 시간, 다가올 시간에 대한 소회, 그의 진심, 나의 진심이 뒤섞여 눈물이 났다.


늘 보고 대화하는 사이지만, 말로 표현되지 않았던 것들이 글에서 드러나기도 한다. 그런 순간 새록새록 사랑을 느낀다.

편지는 두말할 것 없고, 브런치에서 함께 이 매거진을 채우는 것도 내 기대보다 더 큰 재미를 준다. 그의 생각과 마음을 알아도 미세하게 몰랐던 것들이 있고 그 느낌과 무게에 차이가 있다. 내가 좀 합리적으로 유학가보겠다고 이런저런 정보를 찾던 것이 네 눈엔 쥐 잡듯이 뒤지는 것 같았냐며 깔깔 웃고, 내가 알바를 마치고 '안녕?' 하며 문열고 들어오길 기다린다는 그리움 묻은 말에 또 눈물이 찔끔 차오른다.


결혼한 지 1년, 파리에 온 지 10개월. 프랑스에 와서 뭐했나 생각했을 때 영어 시험공부 한 것밖에 떠오르지 않는다고 했지만, 다시 생각해 봐. 우리 칸으로, 비아리츠로, 보르도로 이곳저곳 잘도 돌아다녔고, 주쉬꼬레앙밖에 못하던 네가 이젠 고속버스의 안내방송을 알아듣지. 그간 수십병의 와인을 마셨고, 자주는 아녀도 꾸준히 운동이란 걸 하고 있고, 예전엔 정말 그런 적이 없었는데 이젠 나랑 가끔 신경전도 벌이고. 작년의 우리와 올해의 우리가 참 다르지 않니.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에 어떤 궤도가 있다면, 지금은 확실히 직선의 경로는 아닐 것 같다. 부드러운 회전을 하는 것인지 점점 다른 방향으로 휘는 중인지 그저 한 번의 이탈인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 길을 함께 알아나갈 것이어서 기대가 된다. 여보 앞으로도 잘 부탁해염.

남편, 이거 공개해도 되니? 스물세살 청년이 만든 편지지...


* 이 글은 남편의 지난 글, <첫 번째 결혼기념일은 파리에서> 에 대한 답글입니다.

* 내가 뭘 쥐잡듯이 뒤졌냐...  <나는 전업주부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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