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프에게 기대면 안 되나요
내가 그녀에게 가끔 진담 반 농담 반으로(사실 진담 80% 정도?) 하는 이야기가 있다.
"나 전업주부 하고 싶어."
요리하길 좋아하고, 그에 못지않게 설거지하는 것도 즐긴다. 샥 씻어내고 접시에서 '뽀드득'하는 소리가 날 때 알 수 없는 짜릿함과 상쾌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사실 와이프는 바닥 청소나 빨래 개기와 비교해 설거지는 의외로 대충(?)한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그냥 내가 설거지할게!"가 나온다. 세탁기 돌리는 것도 별로 귀찮지 않고 빨래 널고 정리하는 것도 괜찮다. 아주 깔끔한 편은 아니지만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작정하고 바닥 쓸기와 물걸레질을 한다. 나름 집안일을 즐기다 보니 와이프가 바깥일을 하고 내가 집안일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물론 아직 아이가 없는 데다 사실 '전업'이 아니기 때문에 집안일을 즐기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도 직업이 되는 순간 싫어진다고 하지 않던가. 모든 집안일이 온전히 나의 몫이 아닌 이상 나는 집안일을 선별적으로 선택해서 취미생활처럼 즐길 수 있다. 그래, 집안일이 '일'이라고 느껴지지 않으니 손발 걷고 나설 수 있었던 거 같다(그리고 와이프가 조금 더 집안일을 귀찮아하기도 하고).
어떤 관계든 오래 지속되다 보면 각자의 역할이 생긴다. 친구들끼리 있을 때만 봐도 주로 결정을 내리는 친구가 있는 반면 누구는 투덜이가 된다. 또 누구는 "어떤 거나 괜찮아"하면서 방관자가 되고 또 어떤 친구는 항상 뜬금없는 대안을 제시한다. 이러한 역할 분담은 부부 혹은 연인 사이에서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주로 결정을 내리고 상대는 "별론데?" 하며 초를 치거나 혹은 "좋아!" 하며 군말 없이 따른다. 여기서 포인트는 정보를 찾아 알려주는 사람과 이를 기다리는 사람이 정해진다는 거다. 우리 사이에서는 아내가 전자이고, 내가 후자다.
우리 둘은 모두 확실한 취향이 있다. 예를 들자면 대중적이든 예술적이든 감독이나 작가, 배우의 특색이 잘 묻어나는 영화를 좋아한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영화를 선택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사람들이 많이 보던데 괜찮겠지"보다는 "감독이 누구래" 혹은 "이 배우가 나온대"이다. 특히 와이프는 유럽 스타일, 너무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현실 묘사에 약간 무미건조한 듯 흘러가는 듯 하지만 그 안에 포인트가 살아있는 것들을 좋아한다. 나는 내 식으로 해석한 일본 스타일의 영화, 햇볕이 내리쬐고 매미 울음소리가 우거진 어느 여름날, 여주인공이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역시 덥네"하고는 마무리되는 그런 느낌이랄까? 아무튼 이런 걸 좋아한다.
그러다 보니 어떤 면에서 우리는 단호하다. 특히 와이프는 더욱 확실하다.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좋다며 추천해도 입맛에 안 맞겠다 싶으면 눈길을 주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귀가 쉽게 펄럭이는 편이라 옆에서 누가 "이거 겁나 재밌어" 혹은 "이런이런 거 하는 데 정말 좋을 거 같지 않아?!" 하면 나는 "흐음... 그렇단 말이지...?!" 하며 쉽게 기운다. 하지만 와이프는 "그래 봤자 아니겠어?" "그래도 별로인데"하며 확실한 선을 긋는다. 그녀에게 아닌 것은 아닌 거다.
자연스럽게 많은 결정권은 그녀에게 이양됐다. 마트에서 어떤 어떤 것을 살지, 저녁으로 무엇을 먹을지 같은 것에서부터 학교 지원 서류는 언제까지 끝낼지, 이번 여행은 어디로 갈지 등 많은 부분에서 그녀의 의향을 확실히 짚고 간다. 물론 그녀가 독단적으로 진두지휘하며 결정을 내리지는 않는다. 다만 그녀에게 확고한 취향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녀가 정하는 게 더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확실히 내 취향이 아니더라도 그녀가 "이 음식의 주재료는 채소지만 평점 봐봐 엄청 높아!" 하면 나의 귀는 또 팔랑거릴 걸 안다.
때로 그녀는 큰 부담감을 느낀다. 그리고 때론 답답해한다. 특히 프랑스 유학을 준비할 즈음에 심했다. 와이프는 프랑스 유학을 준비함에 있어 어떤 서류가 필요하고, 이 서류들은 어떻게 준비해야 하고, 일정에 맞추려면 언제까지 마무리해야 하는지 등을 스스로 다 알아봤다. 괜히 유학원에 돈을 내고 알아보는 것보다 우리가 스스로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 유학원이 못 미더웠던 것도 있었다. 주변에 이렇게 유학을 준비한 사람이 없다 보니 조언을 구할 수도 없었고, 인터넷에 나오는 추천글들은 괜히 다 광고처럼 보였다.
아무튼 말이 '우리'지 사실은 앞서 말한 것처럼 다 그녀가 했다. 어느 어학원을 다닐 것인지, 임시 숙소는 어디로 잡을 것인지에서부터 더 나아가 공항 라운지 혜택을 받기 위해 어떤 카드를 신청하면 좋은지 치밀하게 찾아봤다. 나는 그런 그녀를 믿고 묵묵히 따랐다. 하지만 그녀도 사람인지라 한계가 있었다. 어느 날은 조용하지만 묵직하게 나에게 "나 혼자 준비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건 뭘까? 이런 건 너도 알아볼 수 있잖아"라고 했다.
물론 나도 알아볼 수 있다. 다만 내가 마치 어미새가 물어주는 먹이를 받아먹는 새끼 새처럼 있었던 것은 결국 그녀가 다시 알아볼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 번은 파리에서 다닐 어학원을 같이 알아보자고 해서 찾아보고 있었다. 그러곤 "이 학원 괜찮을 거 같다"라고 했더니 그녀는 "다른 평은 없어? 한 번 더 알아보자"라고 했다. 근데 문제는 생각보다 어학원에 대한 정보가 많이 안 나온다는 것이다. 대부분 유학원을 통해 올라온다 거나 있어도 한 두 개가 다였다. 그랬더니 그녀는 결국 자기가 알아보겠다며 파리에 있는 어학원을 쥐 잡듯이 뒤졌다. 그리고 그녀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이런 상황은 일상에서도 종종 나타난다. 가끔 와이프는 "오늘은 네가 하자는 대로 할게! 저녁 메뉴 먹고 싶은 걸로 골라!"라며 호기롭게 나설 때가 있다. 그러면 나는 "오 정말?!"(사실 속으론 반신반의하면서)하면서 쾌재를 부른다. 그러곤 메뉴를 던진다. "짜장면!" 그러면 그녀는 "음... 다른 건 뭐 없을까?"라고 한다(역시...!). 이어 "곱창?!"이라고 하면 "아 별로 안 당기는데... 하나만 더 말해봐"(이렇게 되면 사실상 게임 끝이다)라고 한다. 이쯤 되면 그녀에 취향을 고려해 메뉴를 던져야 한다. "그러면... 미역국...?!" 그러면 "좋아! 그거 먹자!"가 된다. 가끔은 마음에 걸리는지 정말 군말 없이 내 결정을 따르겠다고 할 때도 있다. 그땐 정말 내가 어떤 메뉴를 골라도 그녀는 "그래 좋아"라고 한다. 하지만 그게 본심이 아니라는 건 우리 모두가 안다. 이미 그녀의 표정에 다 드러난다. 그러면 내가 재차 확인을 한다. "확실히 이거 먹어도 괜찮아?"라면 그녀는 "음... 그러면 다른 거 먹지 않을래?"라곤 한다.
물론 와이프가 항상 그러는 건 아니다. 정말로 흔쾌히 나의 결정을 믿고 지지해줄 때도 있다. 다만 취향이 너무 확실한 그녀이기 때문에 그녀는 본인의 진심을 잘 가리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그걸 보는 게 신경이 쓰인다. 그리고 그녀에게 좋은 건 나에게도 좋으니까(샐러드만 빼면?!). 그러니 차라리 와이프가 아무 부담 없이 최종 승인권을 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난 믿으니까.
한번은 내 친구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너에게 자아가 있고 그 안에 초자아가 있다면, 초자아에는 그녀가 있을 거야. 그래서 만약 둘이 헤어지면 너는 없어질 거야."라고. 어느 순간 나의 중심에는 그녀가 자리 잡았고 나는 너무 의존적인 사람이 되었다. 나의 배려가 혹은 존중이 의존증을 낳은 듯하다. 근데 그게 어때서. 지난 시간은 나 혼자서 지내왔다면 내 남은 시간은 그녀에게 의지하기로 결정한 것뿐이다. 단순히 결정을 해주는 게 아니라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으로 그녀를 택한 것. 그게 결혼이지 않을까.
그래서 말인데, 내일 뭐 먹을까? 유명한 짜장면집이 있긴 하던데?!
*이 글은 <너는 공부해. 내가 밥할게>에 대한 답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