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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비 Aug 30. 2019

양말은 어지르고

아무리 여러 번 들어도 자꾸 까먹는 게 있다. 그의 양말은 침대 맞은편에 있는 옷장의 밑에서 두 번째 칸 오른쪽 맨 앞에 둔다던가 엄마의 생일이 7월 9일이라는 것 등. 정확한 날짜가 기억나진 않아도 버릇처럼 6월 말이 되면 "엄마 생일이 언제더라?"며 나도 모르게 질문을 던진다. 그러면 그는 냉큼 "7월 9일"이라고 알려준다. 그때마다 그는 생일 날짜를 외우려고 하지 말고 주민등록번호를 기억하라고 했다. 아무 이유 없이 한 사람의 존재를 각인하는 데 생년월일 여섯 숫자를 쓰는 게 아니라고 했다. 그건 그 조합이 가장 외우기 쉽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엄마의 생일 되뇌는 나의 질문에 대한 그의 답에는 사실 찰나의 간격이 있다. 마치 무조건 반사처럼 반응하는 듯 하지만 왜냐면 그는 우리 엄마의 주민등록번호 앞자리인 570709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여기서 정보상 의미가 없는 57이라는 숫자를 뺀 뒤 0709를 다시 7월 9일로 재조직하는데 시간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집안일은 그가 하지만 나는 종종 빨래를 개곤 한다. 바짝 마른 빨래들을 정리할 때마다 가장 마지막에 남는 것은 그의 양말이다. 짝대로 정리해 두지만 정작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기억이 안 나기 때문이다. 위에서 두 번째 칸이었나? 왼쪽 맨 뒤였나? 잠시 침대 맞은 편의 옷장을 바라본다. 앞니 빠진 아이가 치과 의자 위에 벌리고 있는 입처럼 이곳저곳 비어 있는 옷장. 난 잠시 치과의사가 된다. 너무나 밝은 조명 아래서 눈을 꼭 감고 두려움에 떠는 아이가 흐느끼듯 삐그덕 거리는 옷장을 쳐다본다. 이내 포기하고 그의 양말들은 침대 위에 그대로 둔다. 자칫 손을 잘못 대면 아이는 치과 공포증이 생겨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테니 말이다. 좀 더 능숙한 의사인 그에게 맡기도록 한다.



그는 양말을 옷장의 밑에서 두 번째 칸 맨 앞에 두면서 늘 같은 이야기를 한다. 숫자에 대한 개념이 약해서 이런 걸 잘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는 엄밀히 따지고 보면 이 세상은 숫자놀음이라고 했다. 양말 정리도 밑에서 2번째 있는 칸에선 맨 앞, 다시 말해 1번째 열이라고 생각하면 쉽다는 것, 엄마의 생일을 기억하는 것도 어떤 원리에 따른 숫자들의 나열이라고 생각하면 된다는 것. 각자가 정의 내리기 나름이지만 어쨌든 모든 건 수의 원리가 지배한다는 것, 나에겐 그런 감각이 없다는 거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학교 수학 시험에서 매번 100점을 맞았다고 항변한다. 그러면 그는 수학은 외우는 게 아니라 이해하는 거라며 외워서 푸는 수학 시험과 세상의 숫자놀음은 전혀 다르다고 한다. 그가 여태껏 받은 수학 시험 점수 중 가장 높았던 건 재수해서 본 수능시험에서 받은 76점이다. 


그에게는 우리가 사랑을 나눈 후 항상 치르는 의식이 있다. 그는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나의 위에 엎드려 깊고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아무리 나의 뒤에서, 나의 밑에서, 나의 옆에서 그 순간을 즐겨도 마무리는 나의 위에서였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찾아오는 그의 오르가즘이 끝난 후 그는 나의 가슴에 귀를 대고 숨을 몰아 쉬며 숫자를 센다. 1, 2, 3, 4... 60. 그리고 112.


그는 나의 맥박을 잰다. 얼마나 빨리 뛰는지 혹은 안 뛰는지 그는 매번 확인하고 잰다. 1, 2, 3, 4,... 60 그리고 100. 처음에는 후위 중 하나라고 여겼다. 둘 사이의 긴밀함과 애정, 욕망이 최고조의 달하며 서로가 자신의 몸으로 상대를 제압하고, 누르고, 압박하고, 묶는다. 우리는 실이 되어 결코 풀 수 없을 것처럼 뒤엉긴다. 휘말리고, 꼬이고, 뒤섞여 퇴로를 알 수 없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이 된다. 그러다 한숨에 풀린다. 다시 우리는 기나긴 뱀이 되어 너무나도 매끈하게 서로의 매듭을 풀어간다. 이제 매듭은 아리아드네의 실타래가 되어 빠져나갈 출구를 알려준다. 하지만 서로에게 남아 있는 여운을 느끼며 우리는 조심스러우면서도 정성껏 실을 되감는다. 그의 행위는 그런 것들 중 하나, 말하자면 복잡하게 얽힌 매듭을 잘라버리는 알렉산더가 되지 않으려는 그의 한 과정이라 생각했다. 112, 104, 109, 98, 101, 94...


숫자는 또 하나 늘어난다. 이 숫자들의 나열은 끝을 모르고 계속 펼쳐지는 무한대처럼 이어지고 있다. 뒤에 다시 세 자리 혹은 두 자리 숫자가 생겨날수록 어딘 지 모를 메스꺼움이 일어났다. 언젠가는 이 숫자놀음도 끝날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일까? 이미 시작된 나열인 이상 어떻게든 끌고 가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일까? 혹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뛰고 있는 심장 박동이, 수치화되어 그의 입에서 발설됨과 동시 마치 이제 막 도살되어 등급 판정을 받는 머리 잘린 소가 되는 거 같은 기분이기 때문일까? 그 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이 숫자들의 규칙 없음이었다. 이 무규칙성은 기요틴의 칼날처럼 느껴졌다. 우리의 행위가, 우리의 욕망이, 우리의 감정의 결과로 나오는 숫자들의 무논리는 결국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고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와 나의 관계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한 것이다. 이 관계의 연장성에 있는 이 숫자들처럼 우리는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나를 휘감았다.


그는 자신의 숫자놀음이 아무 의미 없는 거라고 했다. 아니, 물론 의미는 있다고 했다. 그건 애초에 내각 생각했던 것처럼 우리의 실타래를 조심스럽게 풀어가는 거라고 했다. 그러다 나와 조금 더 가까이 이어지면서, 나의 맥박을 더 가까이 느끼면서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고 싶은 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신경이 쓰인다면, 다음부터는 멈추겠다고 했다. 



0. 그날 새롭게 추가된 숫자는 0이었다. 그가 나의 맥박을 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루틴을 어기면서 느끼는 찝찝함과 불안감과 마주했다. 어떻게 실타래를 풀어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마치 미로에서 길을 잃은 아이처럼 얼굴을 잔뜩 찡그려 곧 울 것만 같았다. 그래도 금세 안정을 찾았다. 우리의 실타래가 조금 뜯겨 나가긴 했지만 이내 출구를 찾아 나왔다. 그는 자신의 가슴 위에 오른손을 올렸다.


정작 매듭을 잘라 버린 것은 나였다. 알렉산더 대왕이 커다랗고 휘향 찬란한 칼들 쳐들어 매듭을 베어 버렸듯, 우리의 실타래를 조각내 버린 것은 나 자신이었다. 길게 이어지던 수의 나열 맨 마지막에 붙은 0. 그것은 끝이었고 종말이었다. 그와 내가 구축해 온 시간들과 관계가 그대로 사라져 버린 것처럼 다가왔다. 규칙이 없었을지언정 우리는 계속 나아갔다. 논리적인 설명은 불가능하더라도 우리는 계속해서 흔적을 남겼다. 그리고 그 안에 내가 있었다. 그것이 오늘, 종결을 짓고 말았다. 숫자들은 이제 난도질 당해 흩어져 허공으로, 저 바닥으로 사라졌다. 배수구를 따라 휘말려 들어가는 욕조에 담긴 물처럼, 나 자신도 조그마한 구멍을 따라 아래로 아래로 떠내려 갔다.


다시 그에게 말했다. 다시 내 위에 엎드리라고, 그리고 수를 세라고. 그가 이야기하는 세상의 숫자놀음 따위는 내가 어떻게든 찾아낼 테니 다시 수를 세고 입밖에 내놓으라고 재촉했다. 아직 끝난 게 아니라고 말했다. 물론 조금 전의 순간은 끝났지만, 사실 늘어선 숫자들 사이에 0이 있는 건 이상하지 않으니까 아직 끝난 건 아니라고 했다. 문제는 조금씩 가라앉고 있는 심장박동을 되살려야 한다는 거였다. 조금 남아 있는 이 여운의 꿈틀거림이 다시 평상시로 돌아간다면 정말 끝이었다. 그러니 지금 다시 시작해야 했다. 나는 그를 재촉하고 압박하고 누르고 몰아세웠다. 하지만 그는 풀이 죽어 있었다. 그도 노력하고 발악하고 애원했지만, 한번 죽음은 죽음이었다. 죽은 그는 되살아나지 못하고 우리 모두 진이 빠졌다. 그렇게 우리는 얽힌 실타래만 남긴 채 평상으로 돌아가야 했다.


침대 위에 그의 양말들이 너질러있다. 짝도 맞추지 않은 상태로 하나는 이불 위에, 다른 하는 이불 아래, 또 다른 양말들은 베개 위에 놓여 있었다. 침대 맞은편 옷장은 여전히 입을 벌리고 있다. 하지만 이날 옷장은 앞니 빠진 아이가 벌린 입처럼 벌벌 떨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욕조의 배꼽과도 같은, 다 빨아들이는 배수구처럼 짙고 어두운 그림자만 드리우고 있었다. 나는 옷장 안 모든 것을 다 끄집어냈다. 그냥 들어낸 것이 아니라 집어던졌다. 그리고 침대 위 양말들을 그 안에 집어던졌다. 


밖으로 나왔다. 쨍한 햇빛이 내려 찌고 있었다. 어느덧 여름인가 싶은 6월 말이었다. 그러고 나는 "엄마 생일이 언제더라?"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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