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굳었고 그대로 말랐다.
정사각형에 가까운 네모지고 어두운 좁은 방 한가운데 그는 앉았다. 방바닥에 쭈그려 앉아 그는 자신의 앞에 있는 넓은 흰 종이를 보고 있다. 흰색 종이는 상당히 컸다. 얼핏 보면 그의 이불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그 옆에는 각양각색의 색을 담은 페인트통들이 있었다. 검은색, 흰색, 녹색,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등. 우리가 색을 떠올릴 때 쉽게 생각나는 색들이 다 있었다.
2열 혹은 3열로 정돈된 듯 아닌 듯 깔려 있는 물감들 앞에는 또 커다란 널빤지가 있었다.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골판지 박스를 뜯은 널빤지였다. 널빤지는 이미 여러 색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그 위에는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색들도 있었지만 각각의 색이 뒤섞이며 새로운 색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 널빤지도 크기가 상당해 얼핏 보면 그의 더러운 침대처럼 보였다. 그 옆에는 다양한 크기의 붓들이 있었다. 물감이 굳어 더 이상 쓸 수 없을 것 같은 페인트 룰러도 있었다. 작은 붓은 방바닥에 눌어붙었고, 그의 엄지손톱만 한 붓은 널빤지에 달라붙었다. 어쨌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구색은 갖춰진 듯 보였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그리고 싶어 하는지 알지 못한다. 빛 한 줄기 새어들지 않는 방에 있다 보니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른다. 30분? 한 시간? 그의 곁에는 째각이는 시계도 없고 제때 알람이 울리는 휴대전화도 없다. 그에게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는 유일한 것은 계속 쭈그려 있으면서 저려오는 다리의 감각뿐이었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명종에서 튀어나와 징을 치는 원숭이 인형처럼, 그는 저리는 다리를 풀기 위해서 일정 시간마다 자세를 바꿨다. 다리를 펴거나, 양반자세를 하거나, 서 있거나. 그는 부지런하게 자명종의 인형들을 흉내 냈다.
자세를 네 번쯤 바꿨으니 두 시간 정도 흘렀을 거 같다. 붓끝은 점점 더 말라가고 뚜껑을 열어 놓은 물감의 겉표면에도 얇은 막이 생기기 시작했다. 빛조차 들지 않는 방이다 보니 환기가 될 리 만무하다. 170cm 정도의 그가 두 다리를 뻗으며 간신히 누울 수 있는 너비에, 100 사이즈 셔츠를 입는 그가 쭉 뻗어 누운 채로 다섯 번 정도 구를 수 있는 길이의 방, 그 방 안에 시큼하면서도 느끼한 페인트 냄새가 가득했다. 그는 살짝 어지러웠다. 하지만 그게 페인트 냄새 때문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는 피로감에서 온 어지러움이라 여겼다. 그래서 그는 방문을 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의 생각이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간과해서 안 되는 것은 그 방안에 문이 있는지 없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시 두 번쯤 더 자세를 바꿨다. 아마도 한 시간이 더 흐른 듯하다. 고민의 끝에 도달한 듯 그는 지금과는 다른 몸놀림을 보였다. 그는 일자로 똑바로 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안경을 벗고, 목이 늘어난 노란색 셔츠를 벗어던졌다. 바지와 속옷은 한꺼번에 벗고는 옆으로 치웠다. 그러고는 온갖 색들이 소용돌이치는 널빤지 위에서 서서 검은색 페인트 통을 들어 표면에 생긴 얇은 검은 막을 걷어냈다. 오른쪽 중지로 검은 물감을 졌던 그는 아예 오른손을 물감에 담갔다가 살짝 손을 들었다. 그는 자신의 손끝에서 물감 표면까지 이어진 검정 줄기들을 보며 흡족해했다. 다시 한번 검은 물감 속에 손을 담근 그는 이내 손을 빼내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다. 이어 빨간 물간을 들어 같은 동장을 반복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배에서 오른쪽 허벅다리까지, 다음 노란 물감으로는 오른쪽 엉덩이에서 왼쪽 종아리까지, 초록 물감은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가슴까지, 보라 물감은 그 반대로. 이어 흰색 물감은 다시 처음의 단계를 되풀이했다.
조금의 변주를 가했지만 같은 과정이 반복되자 처음 느꼈던 만족감이 조금씩 희미해졌다. 선명하게 빛나는 색들의 경계가 서로 섞이면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 흐리멍덩한 구역이 되는 것처럼, 그의 기쁨과 희열도 색이 바랬다. 그는 다시 쪼그려 앉았다.
다시 다리가 저려오자 그는 다리를 뻗고 앉았다. 그 때문에 그의 엉덩이와 두 다리에 묻은 물감들이 그가 앉은 널빤지를 덮었다. 이 행위는 이미 색들의 난장판을 벌이던 널빤지의 표면 위에 새로운 광기를 만들어 냈다. 예전의 무질서함은 다시 뒤덮이고 새로운 무규칙이 자리 잡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널빤지를 새롭게 정복한 색들은 아직 마르지 않은 찐득함을 유지하고 있었고 페인트 특유의 기름내도 갖고 있었으며, 어쩌면 그로 인해 빛이 있다면 더 밝게 빛나고 있었을 거라는 점이었다.
한동안 서 있던 그는 허리가 아파오자 등을 대고 누웠다. 또 다른 색들이 널빤지에 뛰어들었다. 빨강과 노랑과 검정 등 앞선 널빤지의 지배자들은 초록과 보라와 흰색과 같은 새로운 군주를 맞서야 했다. 여전히 일부 구역에선 본인들의 영향력을 드러내고 또 어디선가는 새로운 침입자들과 뒤섞이며 발버둥을 쳤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그의 등은 무자비하게 널빤지를 짓눌렀다. 그래도 이 같은 저항이 미미하게나마 효과를 낸 건, 그로 인해 그의 등도 빨강과 노랑과 검정이 들러붙었다는 거였다.
서로 점령하고 뒤덮고 침범하는 과정을 보며 그는 겉표면의 이면을 응시했다. 의도와 비의도를 넘나들고, 통제와 무질서가 난무하고, 저항과 복속이 이어지는 전개 속에서는 그는 의도를 깨달았고 의미를 찾았다.
그가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는 자신의 몸 위에 물감을 부었다. 어떤 색은 오른쪽 다리 위에, 다른 색은 왼쪽 엉덩이 위에, 또 다른 건 아예 머리 위에. 그렇게 그는 자신의 손끝과 물감의 표면을 잇던 물감 줄기 자체가 됐다. 그 뒤 그는 커다란 종이 위에 바짝 엎드렸다가, 누웠다가, 쪼그렸다. 그러기를 반복했다. 이제 흰색 종이는 또 다른 널빤지가 됐다.
하지만 이번에도 전과 마찬가지로 점점 그 희열이 줄어들었다. 다시 물감을 솟아 붓고 혼합하고 드러눕고 쭈그려 않고 바짝 달라붙었지만, 처음의 그 기분은 되찾을 수 없었다. 다급함을 느낀 그는 새로 생긴 널빤지를 바라보며 발을 굴렀다. 머리를 쥐어 잡고 고민을 계속했다. 그 찰나의 순간에도 페인트에 젖은 머리카락과 손바닥은 서로 달라붙었고, 그럴 때마다 그는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과 무수히 빠지는 머리카락은 점점 더 그를 압박하고 옥죘다. 그는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라고 생각했다.
각양각색의 그는 방 끝에 발을 뻗고 누웠다. 그러곤 반대편 방 끝으로 구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방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작았다. 다섯 번은 구를 줄 알았는데 그는 네 번밖에 구르지 못했다. 아무튼 중요한 건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다시 처음들의 감정들을 되찾았다는 거다. 그의 방바닥은 더욱더 큰 널빤지가 되어 색들의 향연이 펼쳐졌다. 그는 참지 못했다. 다시 몸 위에 물감들을 붓고 또다시 굴렀다. 쿵쾅쿵쾅. 4번 구르고 다시 물감을 두르고, 쿵쾅쿵쾅. 다시 또 물감을 끼얹고 네 번 굴렀다.
이내 모든 물감들이 동났다. 그는 구르고 싶어도 더 구를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방안을 가득 채웠던 페인트 냄새는 더욱 강하게 퍼졌다. 사실 더 퍼질 공간도 없는 방이지만. 하지만 알아야 할 것은 사실 그의 행위는 바닥난 물감 때문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 중단했다는 거였다. 이번에도 아니나 다를까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등 횟수를 반복할수록 그의 흥미도 추락했다.
보다 더 중요한 건 구르기를 계속할수룩 열기가 줄었을 뿐 아니라 각양각색의 색이 뒤섞이고 혼합되면서 되레 한 가지 색으로 통일됐다. 각자의 선명한 색을 뽐내던 자리는 점점 더 희미해지고 어두워지고 결국은 검은색이 됐다. 광기와 같던 색들의 폭발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어느덧 그가 정신 차리고 본 바닥은 그저 검고 검은 바닥이었다. 원래 그는 검은 방에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는 물감으로 떡칠이 된 방바닥에서 그가 태초의 널빤지에서 자각했던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는 길을 잃었다.
그는 다시 쭈그려 앉았다. 다리가 저려오자 다리를 뻗고 앉았다. 그러다 미끄러지듯 그의 상체도 바닥에 붙었다. 그는 잠에 들었던 걸까, 아니면 죽은 것일까, 아무튼 꽤 시간이 지났다. 그와 방바닥을 장악한 페인트들은 수분을 잃어갔다. 그렇게 마르고 굳어버렸다. 마치 태초의 널빤지 달라붙었던 붓들처럼 그는 방바닥에 달라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