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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비 Oct 04. 2020

모스코우 3

그저 몰랐을 뿐이다.

보안 검색대를 통과할 때 물을 갖고 있으면 안 됐습니다. 반 이상이 남아 있었는데 아까운 마음에 한 모금만 더 마시고 버렸습니다. 물을 살 때만 해도 작은 생수 하나 정도는 그 자리에서 비워버릴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너무 갈증이 났었으니까요. 그런데 물이 너무 차갑더군요.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물의 첫 모금은 퍼석한 고구마 세 개는 먹은 거 같았던 제 목구멍에 락스를 뿌린 것처럼 너무나도 깔끔히 씻어주었습니다. 하지만 정도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자칫하단 모든 걸 다 부식시켜버릴 수 있으니까요. 피부도 상할 수 있고요. 세 모금 이후부터는 처음의 깔끔한 기분은 사라지고 정말 목구명 전체를 긁어내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습니다. 어쨌든 이거면 비행기 탈 때까지 물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싶었습니다. 보안 검색대라는 예상 못한 변수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죠. 너무도 시린 물을 너무도 갑자기 마셨기 때문인지 그때는 전혀 갈증이 나지 않았습니다. 


처음 비행기를 타는 거라 사실 무엇을 해야 할지 정확히 몰랐습니다. 미리 인터넷에서 알아보기도 했지만 극도의 긴장과 이완이 반복되면서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았습니다. 안내판이라도 봤어야 했는데 그것도 그냥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사실 그때는 안내를 보더라도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겁니다. 이제 제 앞에 두 사람만 남았고 저는 그들을 관찰하기로 했습니다. 보니깐 노트북과 패드 같은 것들을 가방에서 꺼내더군요. 고가라 그런 걸까요? 아무튼 전 그들을 따라 하기로 했습니다. 



제 앞사람이 전자 검색대를 통과하기 직전, 전 가방을 내려놓았습니다. 널찍한 초록 플라스틱 바구니더군요. 저는 본 것처럼 제 가방에서 노트북과 패드를 꺼내 따로 담았습니다. 그때 제 바로 앞사람, 그러니까 검색대를 통과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그 사람의 한숨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미 한숨 소리라면 진절머리가 났습니다. 제가 또 뭔가를 잘못하고 있는 걸까요? 신경질이 났습니다. 내가 왜 여기 있을까, 뭐 대단한 일을 한다고 이 고생을 해야 하나 싶었습니다. 근데 생각해보니 그 사람은 제 앞에 있던 사람이니 제가 뭘 잘못하든 그 사람의 일정에는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지 않습니까? 그제야 정신을 다시 가다듬고 검색대 건너편을 살펴봤습니다. 뭔가 어수선하더군요. 제 앞 앞에 있던 사람 짐에서 무슨 문제가 있었나 봅니다. 정확한 사정은 모르겠으나 공항 안전요원으로 보이는 사람 두 세명이 그를 둘러쌓고 있었습니다. 대충 이건 기내 반입이 안된다, 아니 왜 안 되냐, 규정상 그렇다 그런 말이 들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문제의 짐 주인의 얼굴이 벌게지던 건 똑똑히 기억이 납니다. 나름 이성을 유지하며 침착하게 말하려고 노력하나 그의 말투에는 이미 날카로운 짜증과 화가 섞여 있었습니다. 한 단어 한 단어 이로 꼭꼭 씹듯 내뱉고 있었으니까요. 


제 눈에는 그 모든 게 무시무시한 공포였습니다. 제가 저 상황에 처하면 어떡하지? 내가 뭐 빠뜨린 건 없을까? 난 왜 보안검색 규정을 기억하지 못하지? 씨발. 


하지만 우선 진정하기로 했습니다. 저 뒤집힌 ㄷ 모양의 검색대는 제 맥박도 확인할 것만 같았습니다. 사람은 거짓말을 하거나 흥분을 하면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혹시라도 지금의 긴장감 때문에 비정상적으로 맥박이 요동치고 있다면, 그것이 모니터에 뜰 것이고 - 아마 빨간 글씨로 깜빡 깜빡이며 주의를 주겠죠? 예를 들어 200! 200!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 이 모든 상황이 이미 익숙한 일상적인 사무처리로 멍하니 모니터만 쳐다보는 검사요원 눈에도 이는 충분히 주의를 끌만한 것이 되겠지요. 그러니 우선 침착해지기로 했습니다. 맥박을 정상수치로 낮추자. 정상으로. 그것만 되뇌었습니다. 그리고 혹시 몰라 휴대전화도 같이 상자에 담았습니다.


제 앞사람이 이제 검사대를 통과했습니다. 그는 이 모든 과정이 익숙한지 문제없이 통과한 그의 어깨에 또 역시 문제없이 통과한 짐을 매고 떠났습니다. 한 검사요원이 저에게 오라고 신호를 주더군요. 침을 삼켰습니다. 근데 이내 후회했습니다. 침을 삼키는 모습도 어딘가 의심스러운 행동이니까요. 긴장하고 있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뭔가 숨기는 게 있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젠장.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제가 통과할 때 검색대에서 빨간등이 깜빡이는 게 보였습니다. 앞에서도 그랬었나? 모르겠습니다. 아무 기억이 안 났습니다. 왜 나한테선 깜빡일까? 나도 내가 모르는 뭔가를 지니고 있나? 누가 모르는 사이에 내 주머니에 뭐라도 넣었던 걸까? 



얼마 전 인터넷에서 보았던 마약 밀매 건이 떠올랐습니다. 어떤 사람이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려는데 누군가가 자기 짐 하나만 부탁했다고 합니다. 정확한 사정은 모르지만 가족한테 보내줘야 하는데 자기가 한국에 직접 갈 수 있는 상황은 못되고 이렇게 부탁한다고 했던 모양이지요. 사례금도 준다고 했던 거 같습니다. 부탁을 받은 사람은 호의로, 혹은 사례금에 동해서인지 모르나 그 짐을 챙겼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안에 마약이 있었던 겁니다. 그는 공항에서 현행범으로 붙잡혔고 모든 상황을 설명했으나 당연히 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글세요. 그게 아무리 사실이라 하더라도 누가 믿어줄까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요. 혹시 제가 그런 상황에 처한 건 아니었을까요?


아무 표정이 없는 검사요원은 저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더군요. 무표정이 아니라 어쩌면 굳은 표정 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문제에 직면할 때 나오는 표정 말입니다. 저에게 팔을 벌리고 서보라고 하더니 그거 있지 않습니까, 넓적한 막대기 같이 생긴 금속 탐지기로 제 온몸을 구석구석 훑었습니다. 


"혹시 주머니에 동전 같은 거 있나요?"


빌어먹을. 주머니에 집 열쇠가 있었습니다. 분명 가방에 넣었었는데 아까 짐을 부치면서 가방을 뒤지다 저도 모르게 주머니에 넣었던 모양입니다. 너무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열쇠를 이 위에 올려놓고 다시 한번 검사대를 통과해주시겠어요? 혹시 벨트도 차셨으면 그것도 풀어주시고요"

"아 벨트는 매지 않았습니다..."

"그럼 열쇠만 두고 한 번만 더 통과해주세요"


다시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고, 겨우 진정시켰던 제 맥박은 다시 요동쳤습니다. 쿵쾅쿵쾅쿵쾅. 제 귀에 들릴 정도였습니다. 잠시 시간을 갖고 진정시키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제 뒤에 있는 사람이 팔짱을 낀 채 굳은 표정으로 저를 보고 있는 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제 옆 검색대 앞에는 그 사람의 일행인지 어떤 젊은 여자가 초조한 표정으로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고요. 그 둘은 눈으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존나 짜증 나네. 그런 거 말입니다.



제 심장은 더 바빠졌고, 제 의식은 그것에 비례해 희미해졌습니다. 젠장,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검색대를 통과했습니다. 순간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습니다. 어떤 처분을 기다리듯 말이죠. 마치 지금 이 순간처럼 이요. 


"지나가셔도 됩니다"


저도 모르게 아 하고 탄성을 지었습니다. 


"열쇠 가져가셔야죠"

"아 네 감사합니다"


한 고비를 넘겼고, 전 다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짐만 챙겨서 게이트로 가면 된다 생각했습니다. 빨리 가고 싶었습니다. 컨베이어 벨트 끄트머리에서 달그락 거리고 있는 제 짐들이 보였습니다. 엑스레이 검색대를 통과하고 나서 그런지 어딘가 색이 바랜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 짐들 앞에 서서 문제가 없다는 확인을 받고 얼른 챙기고 싶었습니다. 


"이 가방 주인 맞으신가요? 잠시 좀 열어보겠습니다"

"네...? 무슨 문제가 있나요?"

"문제가 있는지 보려고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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