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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비 Oct 07. 2020

모스코우 4

그들은 웃었습니다.

누군가 제 가방을 뒤진다? 굉장히 당황스러운 경험이었습니다. 아마 중학교 때 담임이었는지 학생주임이었는지 갑자기 소지품 검사한다고 전 학년 학생들의 가방을 뒤졌던 이후로는 처음일 겁니다. 요즘도 그렇게 학교에서 가방 검사를 하나요? 저희 땐 하교 운동장 끄트머리에 있는 테니스장에서 담배꽁초가 발견됐다며 학생들 소지품을 들쑤신 적이 있지요. 사실 그 테니스장은 학교 시설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학교 운동장 바로 옆에 붙어있는 주민 공용 시설 같은 거였습니다. 늘 항상 동호회 회원을 모집한다는 다 낡아빠진, 누렇다 못해 갈색으로 색이 바랜 현수막 하나 걸려 있었지요 - 테니스 공에 많이 맞아서 그런 걸까요? 그러니 학생들이 피운 담배인지 아닌지도 불분명했습니다. 


어쨌든 학교 측 설명은 점심시간 이후 누군가, 학생으로 짐작되는 사람이 담배를 피우는 듯한 모습이 목격됐고, 실제 그 자리에 이제 막 피운 듯한 담배꽁초가 떨어져 있다는 거였습니다. 일부 아이들은 말도 안 된다며 - 사실 아예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습니다 - 그런 이유로 가방을 뒤지는 게 말이 되나며 그 딴에는 묵직한 반항을 해봤지만 소용없는 일이었지요. 사실 학교 입장에선 진짜 학생 누군가가 담배를 피웠는지 명확한 사실관계가 중요한 건 아니었으니까요. 불시에 들이밀 수 있는 건수가 필요했던 겁니다. 이렇게 보면 정말 학교 측 주장하는 어떤 학생이 담배를 피우는 걸 목격했다는 것 자체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지요. 다시 말하지만 그게 중요했겠습니까? 권위를 행사할 수 있을 정도의 사유면 됐던 거니까요. 그 덕이라고 할까요? 어쨌든 학교 측에서는 담배를 소지하고 있던 학생 여럿을 -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았는데 정확한 수치는 기억이 안나는 군요 - 적발할 수 있었습니다.  



공항 보안요원이 제 가방을 보겠다고 했을 때,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들에게도 어떤 건수가,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줄 어떤 본보기가 필요한 거 아닐까 하고요. 사실 저 모니터들은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 거 아닐까? 그래도 업무라는 게 있으니까 하는 모습은 보여하고, 가장 좋은 방법은 마치 모든 게 정상적으로,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이 육중한 기계가 제기능을 발휘하고 있다는 믿음만 충족시켜주면 되는 거 아닐까? 적당히 본보기를 물색하면서. 물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이건 그때 당시 너무나 당황해서 쪼들리는 마음에 제멋대로 제 의지와 상관없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입니다. 전 지금 그때 상황에 대해서 모든 걸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물론 너무 집중해서 들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혹시라도 누가 잠깐이나마 들을 수 있다는 기대에서 말하는 독백 같은 것이니까요. 


"비행기 타실 때 허용된 기준을 초과하는 액체류는 반입하실 수 없습니다"

"아 네... 그래서 다 가장 양이 적은 것들로만 준비했는데..."


그 보안요원은 샴푸, 치약, 폼 클렌징, 로션, 렌즈 세척액을 하나씩 꺼내면서 말하더군요.



"그런 거 같긴 한데, 문제는 이렇게 따로 챙기시면 안 돼요. 지퍼백 같은 거에 담아서 들어가야 합니다. 혹시 지퍼백 같은 건 없으신 건가요?"

"제가 비행기 타는 게 이번이 처음이라... 그런 규정까지는 몰랐네요..."

"그렇다면 죄송하지만 이것들은 두고 가셔야 합니다"


제 뒤에 있던 남자는 어느새 모든 검사를 마치고 앞에서 대기하던 여자와 같이 이동하더군요. 둘은 뭐가 좋은 지 신나게 웃고 있었습니다. 이제 면세점을 갈 수 있어서? 비행기를 찰 수 있어서? 여행이 주는 즐거움? 왜 그 웃음소리가 제 귀에 선명하게 울렸을까요? 씨발.


안 그래도 들은 것이 없던 제 가방은 더 가벼워졌습니다. 제 가방에서 나온 샴푸, 치약, 폼 클렌징, 로션, 렌즈 세척액이 쓰레기통인지 어느 플라스틱 통에 떨어지며 울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퉁퉁퉁.



3. 면세점


부리나케 그 자리를 떴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최대한 보지 않으려고 하면서 재빨리 도망쳤습니다. 제 뒤로 누군가의 웃음소리, 어딘가 들뜬 대화 소리, 중간중간 들려오는 탄식 - 아마 저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서 나온 거겠지요 -이 들렸지만 다 외면했습니다. 파란 배경의 커다란 모니터를 봤습니다. 제가 타야 하는 비행기의 게이트를 찾아봤습니다. 


그때 친구의 부탁이 떠오르더군요. 담배 좀 사달라고 했습니다. 아직 시간이 조금 있었습니다. 사실 면세점을 돌아다닐 의욕을 1도 없었습니다. 다 귀찮았습니다. 그냥 의자에 앉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담배도 사야 할지 몰랐습니다. 친구에게 카톡을 보냈습니다. 어떤 담배 살까? 답이 없더군요. 1이 지워지지 않고 계속 남아있었습니다. 그래도 친구의 부탁이 떠오른 이상 모른 척할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전 이미 그 부탁을 너무나 잘 기억하고 있다는 증거를 남긴 셈이니까요. 


그런데 다 똑같은 면세점 같은데 뭐가 그리 많던지... 이 중에 어디를 가야 할지 그것부터가 문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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