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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비 Dec 03. 2018

유학생 이비씨, 공부가 하고 싶다.

안선생님...!! 농구가 하고 싶어요...

-정대만 <슬램덩크>


우리 집 아파트 1층집 고양이가 제일 상팔자.


나름의 뜻을 품고 떠난 뒤,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고 나서 프랑스 파리에 기반을 마련했다. 하지만 끝이 아니다. 무엇보다 프랑스에서 살아남기 위한 가장 큰 난관이 남았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그것, 바로 프랑스어를 공부하는 것이다.


아직 어떤 석사과정을 밟을지 결정하지 않았다. 또 이곳에서 일자리를 구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학생비자를 받기 위해서 어학원에 등록했다. 물론 비자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곳에서 학교를 다니고 생활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프랑스어를 공부해야 했다. 이때만 해도 프랑스어로 프랑스 사람들과 이 사회의 내일을 걱정하며 뜨거운 토론을 펼치겠다는 포부를 품었다.


그런데 역시나 인생이라는 놈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 원래 목표는 프랑스 국립대 석사과정을 밟는 거였다. 프랑스 국립대는 외국인 유학생이어도 학비가 없어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용으로 공부할 수 있다(근데 내년부터 바뀐다고 한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학교에서 요구하는 프랑스어 성적이 있어야 한다. 학부로 들어갈 것이냐 석사과정을 할 것이냐에 따라 기준이 다르긴 하지만 최소 DELF B2는 있어야 어떻게든 비벼볼 수 있는 듯하다.


누군가 버려둔 변기에 이런 짓을... 마치 내 마음 같잖아...


한국에서 공부를 했다고는 하지만 자기 계발에 몰두해본 직장인들이라면 이해할 수 있겠지만 한국에서 일과 학업을 병행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군다나 약간은 특수한(?) 직종에 종사하고 있는 지라 생각도 못한 야근과 출장이 줄줄이 이어지기 십상이었다. 그러다 보면 "아... 한국에서 이러는 것보다 프랑스 현지에서 몸으로 부치는 게 가장 좋은 공부일 거야!"라며 자기 합리화를 한 뒤 나태해지곤 했다.


그래도 나름 의지는 있었다. 프랑스 파리에 도착한 당일, 이제 바짝 공부해서 어학성적을 받고 당당히 입학해 내년에는 신입생 마인드로 교정을 거니리라 다짐했다. 나폴레옹 사전에는 포기는 없었다고 하는데 남의 나라 언어를 단기간에 마스터하기란 역시나 "아 접어야 하나...?" 싶을 정도로 녹록지가 않았다. 더군다나 줄어드는 잔고를 보며 이러다간 이도 저도 안 되겠다는 불안감이 야뇨증처럼 불시에 찾아오곤 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그랑제꼴을 준비하는 거였다. 프랑스 대학 체계는 익히 알려진 대로 파리 1 대학, 파리 2 대학 등으로 국립대가 기초다. 하지만 이 외에도 나름 명문사학이 존재하니 이들을 그랑제꼴이라 부른다. 파리 정치대학, 즉 시앙스포도 그랑제꼴 중 하나다. 프랑스 학생들이 이곳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콩쿠르'라 불리는 입학시험을 따로 치러야 할 정도로 나름 콧대 높고 그만큼 프랑스 사회에서도 인정받는 고등교육기관이다. 


초반에 오르세도 가고 좋았지.


많은 그랑제꼴은 프랑스어보다 영어 성적을 요구한다(물론 진학하고자 하는 전공이나 학교에 따라 차이는 있을 수 있다). 글로벌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는 것인지 아니면 학교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프랑스어가 아닌 영어를 먼저 따진다는 것이 괜히 근거 없는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사립이다 보니 학비는 국립대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싸지만 이들의 사회적 지위를 생각했을 때 나쁜 투자는 아닐 듯 싶었다. 그리고 혹시라도 장학금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너무나 아름다운 청사진이 먼저 머릿속을 맴돌더니 불쑥 뛰어들었다.


프랑스어 공부가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차라리 영어가 나을지도 몰라!" 하는 잘못된 착각에 빠졌다. 한국 정규 교육과정을 거치면서 영어는 가장 큰 골칫거리 중 하나였지만 그래도 프랑스어보다는 친숙했으니까. 그렇게 당차게 영어 공부에 몰두했다. 한 달 반 정도 바짝 해서 혹시 모를 그랑제꼴 진학을 준비하리라! 그러고 나서 다시 프랑스어 공부를 해야지! 하는...


공부하려고 책상도 직접 만들었다. 아니 정확히는 조립했다. 마레 근처 BHV 백화점 지하 1층에는 책상과 수납장 등을 DIY할 수 있게 판자나 공구 등을 따로 모아 판매한다.


한 달 반이면 될 거라는 생각을 어떻게 하게 됐는지 모르겠다. 안일함이 먼저였던 나에게 첫 번째 영어 시험 전수는 당연히 낙제점이었다. 그랑제꼴 진학은커녕 어디 내놓기도 부끄러운 수준이었다.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프랑스어 교재는 손에 잡지도 못했다. 시간과 돈 등 이미 상당한 매몰비용이 들어갔기 때문에 물러설 수도 없었다(그러다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처하기도 하지만...).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한 번 더 시험에 응시했다. 


그렇게 또 한 달 반이 지났고, 프랑스에 온 지 5개월 동안 실상 프랑스어 공부를 했다고 할 시간은 한 달 남짓이나 될까 모르겠다. 한 달 정도는 노느라, 석 달 정도는 영어 공부하느라... 프랑스어 공부하겠다고 파리에 왔지만 정작 영어 공부를 더 많이 하게 된 역설적인 상황에 놓였다.


후우...


아직 두 번째 시험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나쁘지 않았던 거 같으면서도 시험 중간중간 저지른 실수가 떠올라 영국에서 공부하는 친구에게 "영어!! #*$&@(#$*@!!" 이러곤 한다. 시험 직후는 또 스트레스 푼다고 프랑스어 공부는 당연히 안 했다... 그리고 만약 이번에도 성적이 안 된다면... 돌이킬 수 없는 매몰비용의 함정에 빠져들고 말 것이다. 


어쩌면 영어시험을 준비한 것은 그랑제꼴을 준비하겠다는 미명 아래 골 아픈 프랑스어 공부를 뒷전으로 미뤄두고 싶었던 게 본심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데 또 사람이 참 간사한 게 영어 공부에 머리가 후끈거리기 시작하니 프랑스어 공부가 정말로 하고 싶어 진다... 공부를 하고 싶다. 근데 언제 할까? 이제 해야 하긴 하는데...


시험을 끝내고 영국에서 놀러 온 친구가 챙겨온 위스키 두 병을 깠다. 겸허하게 결과를 기다리자...!


(사실 그 결과는 나왔다. 나는 세 번째 시험을 치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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