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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재바이브 Oct 20. 2024

낯설게 하기 1 - 평범함 속에 비범한 것이 있다

1. ‘낯설게 하기’는 예술의 시작


대학 1학년 때 어학(語學)을 전공하면서 필수 과목으로 ‘영문학 개론’ 수업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들었던 수업 내용 중 대부분은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는데, "낯설게 하기"라는 용어만큼은 이때 깊게 각인되어 새로운 뭔가를 시작할 때 나침반 같은 역할을 해주고 있다.


‘낯설게 하기’라는 개념은 러시아의 문학평론가 ‘빅토르 쉬클로프스키’에 의해 처음 주창되었다. 그는 문학을 문학답게 하는 문학성(예술성)은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과 관련된다고 생각했다. 즉, ‘낯설게 하기’의 방식에 의해 문학적 특성이 드러난다고 하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의 평범한 일상도 어떤 낯선 방식으로 표현되는지에 따라 멋진 예술의 소재가 될 수 있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 운문과 산문의 대표적 장르라 할 수 있는 ‘시(詩)’와 ‘소설(小說)’을 예로 들어보자.



<○월 ○○일, 일기(日記)>

 수업을 마치고 야간 자율학습을 제친 난 영식이와 함께 시내로 나갔다. 카페에 앉아 둘이서 뭘 할까 고민하다 영화를 보기로 결정했다. 표를 사고 들어가는 순간 같은 동아리 멤버인 미영이도 친구 2명과 함께 온 것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미영이와 인사를 하려는데, 옆에 있던 친구 중 한 명이 나를 보며 살짝 웃음을 지었다. 커다란 눈에 하얀 얼굴. 처음 보는 게 분명한데 왠지 어디에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릿속엔 영화가 아닌 그녀 생각으로 가득했다.

고교 시절 있었던 일을 일기 형식으로 복기(復記)해 보았다. 그 날 있었던 사건을 시간의 순서대로 간단한 느낌과 함께 죽 기술하면 나의 개인 기록인 일기가 된다. 그렇다면 위와 똑같은 사건을 시(詩)로 만들면 어떻게 될까?



<첫만남, 시(詩)>

영식이와 함께 한 오랜만의 자유 시간

뭘 할까 고민하던 우린

아주 고만고만한 결정을 내린다


오랜만에 맡는 팝콘 내음과

여기저기서 들리는 청량한 음료 소리

극장은 어느새 싱긋한 무대가 된다


“야, 널 여기서 보다니.”

뒤에서 들려온 친구 미영이의 인사

“너도 땡땡이?”

"응"

그 때 사알짝 미소 짓는 미영 옆의 천사


불이 꺼지자 난 나만의 무대로 들어간다.



똑같은 사건(이벤트)에 바탕을 둔 글이었지만 일기가 평범하고 일상적인 언어로 담담하게 사건을 기술한 데 비해, 시에서는 똑같은 내용을 보다 축약해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곳곳에 각운(라임)을 배치해 시적 어감이 들게 했다. 결국 시와 일기를 나누는 기준은 사건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어떤 낯선 방식으로 표현하느냐에 따라 갈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설에서는 동일한 사건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사춘기,  소설(小說)>

그 날따라 폐에 헛바람이 들었는지 수업시간 내내 안절부절 못하던 승철은 쉬는 시간이 되자 친구 영식을 불렀다.

“야, 오늘 야자 제끼는 게 어때?”

“왜? 뭐 할 거 있어?”

“아니, 간만에 바람이라도 좀 쐬려고.”

“나도 몸이 근질근질하던 차였는데, 이따 오후 수업 마치면 잽싸게 튀자.”


7교시 제물포 쌤의 물리 수업이 끝나고 담임 쌤이 종례를 마치자 둘은 슬그머니 뒷문으로 빠져 나왔다. 교무실과는 거리가 가장 먼 오른쪽 끝 계단을 이용해 전국시대 일본의 닌자처럼 조용하지만 민첩한 움직임으로 이동했다. 교문을 벗어나자 오후 내내 지끈거렸던 머리가 한결 가벼워진 것을 느낀 승철은 바로 시내로 가자고 영식을 부추겼다.


“오늘 ○○○이 개봉한다는데, 영화나 한 편 때리자.”

“뭐, 그러든지.”

오랜만에 맡는 팝콘 내음과 여기저기서 들리는 빨대 빠는 소리. 평일에는 야간 자율학습, 주말에는 학원 수업으로 꽉 짜인 생활을 했던 승철에게 모처럼 실행한 충동적 외출은 상쾌한 청량감을 주었다.


“승철아!”

반가움이 가득 담긴 여학생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승철은 뒤를 돌아봤다.

“어, 미...영아.”

“야, 너 여기 웬일이냐?”

“오늘 공부도 잘 안 되고 해서.”

“너도 슬럼프니? 사실 나도 그래.”

사진동아리 회장을 맡고 있는 미영은 언제나 생기 넘치는 목소리로 대화를 이끌었다.

“우리 반 친구들이야.”

미영이 뒤를 보며 손짓하자 교복을 입은 여학생 둘이 보였다.

“같은 사진반 동아리, 승철이야.”


눈이 마주친 찰나의 시간. 승철은 미영 옆에서 살짝 미소를 보인 친구를 보며 고교시절 내내 식지 않을 것 같은 어떤 설렘을 느꼈다.



야간 자율학습을 제치고 친구와 같이 간 영화관에서 만난 한 여학생. 일상에서 겪게 되는 하나의 사건이 일기에서는 평범한 서술로, 시와 소설에서는 일상 언어와는 다른 ‘낯선 시(詩)와 소설(小說)의 언어’로 쓰여 졌다. 통상적으로 시에서는 일상(日常) 언어가 갖지 않거나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리듬, 비유, 역설 등을 사용해 일상 언어와는 다른 낯선 결합규칙을 드러내며, 소설에서는 사건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플롯을 통해 낯설게 하고 주의를 환기시킨다. 이처럼 모든 예술은 그 표현에 어울리는 낯설음으로 시작한다.

우리가 작가의 창의적 작품이라 칭하는 많은 것들이 실제로 평범한 사람들 누구나가 겪는 일상적인 소재를 사용한다. 다만 그들은 그걸 낯선 방식으로 풀어낼 뿐이다.

 

    '낯설게 하기 2'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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