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을 말로 그대의 고막을 넘어 뇌까지 손상 없이 전달하고파
내 생각을 타인에게 전달하기 전에, 타인이 왜곡해 듣거나 오해할까 봐 좀 더 적합한 어휘는 무엇인지, 악센트를 어느 글자에 둘 것인지 등을 미리 정해두는 편이다. 시뮬레이션처럼 상황을 가정하고 여러 후보 문장들 중 어떤 각도에서든 가장 선명해 보이는 문장을 고른다. (배려의 언어사용을 전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번한 오해는 실수로 건드린 도미노처럼 걷잡을 수 없이 뻗어간다. 그럴 때면, 해명을 안 해버리고 체념과 포기로 자위하는 내 사고방식을 주관하는 뇌를 칼로 쑤신 뒤 휘젓고 칼 옆면으로 눌러 뭉개버리고 싶다. 그로 인해 방금 낚아챈 생선처럼 펄떡이고 과열된 마음을 내가 좋아하는 음악으로 냉각하고, 천장에 끼인 수증기는 찝찝하지만 외면하고 내버려 둔다.
오해하는 타인에게 다시금 해명하면 얼굴주위에서 피를 빨고 싶어 안달 난 끈질기고 성가신 모기 같은 설명충으로 낙인찍힐 것이라는 두려움과 그로 인해 인간관계가 손상될까 봐, 오해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괜히 차고 보는 길 위의 돌멩이 같은 것이고, 나는 그 돌멩이기에, 나만, 한 명만을 억울하게 아프게 함으로, 오해받아도 넘어가자는 생각으로 사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똑똑한 사람을 주위에 두면 오해를 덜 할 거 같다는 점에서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를 희망했기도 하다. 그리고 농담 삼아 남극에 가서 살겠다는 말도 하곤 했다. 남극 세종 과학 기지에는 똑똑한 연구원들밖에 없기에 내 말을 잘 이해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한편, 자존이 올라가며 오해받아도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살게 되었다. 타인들의 오해하는 나는 실제 내가 아니며, 타인의 시선보다 더 중요한 건 내 시선이기도 하고... 아무튼 자존이 올라가면 남의 시선에 대한 의식이나 인식이 급격히 흐려지는 걸 경험했다.
내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회 부적응자라거나 눈치 안 보고 옷을 벗는다거나 하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사회와 괴리되지 않으며, 나름의 주체적 개인으로서 공동체의 조화에 기여한다.
말하기 전에 시뮬레이션을 하는 습관이 언제부터 생겼냐 하면 그건 초등학생 때다. 내가 소심하였기에 혼잣말로 자주 놀았고, 그 습관이 점점 지속되니 심화하여 결국 가상의 상황을 설정한 뒤 혼잣말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잘못이나 실수를 한 뒤 자칭 어른 따위에게 혼나기 전에 미리 변명거리를 다듬기도 하고 심지어 창작까지 함으로써 여러 위기를 모면하는 것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이 습관은 중학교 3학년 때 크게 빛을 발한다.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칠 드립을 미리 정해두고 그걸 맥락에 맞춰 적용하면 친구들이 웃어주는 게 너무 행복했고 즐거웠다. 그러다 보니 말을 할 때 어느 구간에 악센트를 두는지, 톤은 어떻게 잡는지, 기승전결을 정하거나 너무 외워온 티를 안 내려는 등의 디테일을 챙기는 다양한 전략들을 갖게 되어 더 정교한 대사를 만드는 실력이 늘었다. 나는 마치 배우처럼 주위 작중인물들에게 대사를 날리고, 감독처럼 이 드라마의 미세한 디테일까지 챙긴 셈이었다.
말을 할 때, 그 말에 근거가 있어야 한다. 언론기사나 책, 심지어는 논문까지... 많은 자료들을 통해 자신의 말을 뒷받침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지만, 문제는 사람은 말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운동 열심히 해서 건강하게 사세요
이 말의 의도는 무엇인가? 아마 모르긴 몰라도, 운동을 통해 상대방의 건강을 챙겨주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 운동을 통해 건강하게 된다는 명확한 인과관계를 증명하는 자료를 내놓아라. 그리고 열심히의 기준은 무엇인가? 건강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슨 운동을 어떻게? ••• "라고 말하는 사람은 어떤가? 이런 사람을 '근거를 중요시하는 합리적이고 현명하고 지혜롭고 총명한 인간'이라고 볼 수 있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은 말을 쉽게 던지고, 그 말이 어떤 모양으로 세상에 나와 어떤 궤적으로 떨어지는지는 관심도 없다. 모든 할 말에 모든 근거를 내놓고, 명확한 인과관계를 제시하고, 그 근거의 모든 출처를 밝히면서 말하기에는 인간은 말이 너무 많다. 그러니 타협을 해야 한다. 세상에 정보는 너무 많아서 다 알 수 없고, 그 정보를 다 안다고 해서 올바른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올바른 말을 못 한다고 해서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당신의 오류가능성을 타인이 배제하지 않는다. 따라서 합리적인 사람이 되고 싶고 합리적인 말을 하고 싶다는 무모한 욕망을 버려야 한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좌절 후 체념하고 포기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말을 잘 안 하게 되었다.(여기서 말하는 말은 개드립이나 유머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조언을 하는 것도 조심스럽다. "니 알아서 해라"는 조언을 따르는 사람은 알아서 하는 능동적인 인간인가? 아니면 조언을 따르는 수동적인 인간인가? '나라면 어떻게 했을지'에 대해 말하는 것도 문제다. 실제로 내가 직면한 것이 아니라, 직면했다는 가정하에 말하는 것이기도 하고, "나라면 ~를 했을 거 같지만 내가 직접 처한 상황이 아니기에 확실하지 않다"라고 장황하게 서술하면 듣는 이의 입장에서 더 혼란만 가중될 뿐이다. 또한, "리모컨을 잃어버렸다"라는 말을 듣고 "소파밑을 찾아봐"라는 상대가 이미 했을 법 한 뻔한 조언을 하는 것은 상대를 '뻔하고 사소한 해결책도 아직 시도 안 해본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단정 짓는 것처럼 보인다.
어머니는 나를 혼낼 때 항상 내 의견을 물었다. 나의 부적절한 마음가짐의 의도를 말하게 하고, 이를 교정해 주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혼날 때마다 나는 내 생각을 정확히 표현한 말이 떠오르기 전까지 말을 안 한다. 그러면 내게 말하기 싫냐고 묻는 어머니께 "아니"라고 대답하는 것까지가 혼나면 반드시 발생하는 템플릿이다. 말을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게 아니다. 내 의도를 너무 말하고 싶지만 숙성을 거치지 않은 말은 간이 배어있지 않고 날것의 표현으로 비려 의도와 다른 맛이기 때문에 결국 나름의 빚어낸 말을 뒤로한 채 "몰라"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가족이 먹는다고 생각하고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처럼, 내가 보기에 불완전한 말을 타인에게 진심인 양 내놓는 것을 난 용납할 수 없다. 오해를 유발하지 않을 정도가 될 때까지 계속 점검한 후에야 비로소 말을 할 준비가 된 것이다. (한번 보고 말 사람이면 몰라도...) 그래서 그 숙성의 시간을 조금씩 조금씩 줄여나가기 위해 말하고 글 쓰는 훈련을 하고, 다양한 표현의 글을 경험해야 한다.
어머니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도 나는 대답을 자주 지연시키는데, 그때마다 상대방은 과부하가 걸릴 정도로 빠르게 돌아가는 내 뇌가 거짓말을 지어낸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해도 된다. 언젠가는 내 진심을 알게 되거나, 비즈니스 관계가 되거나, 앞으로 볼 일 없는 사람이 되는 세 가지 경우밖에 없을 거라는 확신이 있다.
어제 내가 말을 정확히 전달하는 것에 대해 적었던 글이 자꾸 떠올라, 나가게 문 열어 달라고 두드려 대는 문장들을 여럿 돌려보냈다. 뇌 한 바퀴 돌고 온 문장은 체력이 거의 바닥이었다. 검증을 안 했다면 걸러내지 못했을 이 저질체력의 문장이 밖에 나갔다면 얼마 걷지 못해 쓰러져 주위를 기겁하게 했을 것이므로 문장이 밖에 안 나간 게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 난 말을 정리하고, 곱씹어보고, 가다듬다가 시기를 놓쳐 늦게 뱉어버린 말에서는 코에 띄는 홀애비냄새가 그렇게 강하게 날 수가 없다. 제사상 위 음식 쌔비는 개새끼 마냥 발로 차여도 싼 눈치 없는 문장은 왠지 모르게 메아리처럼 아주 느리게 사라지고, 그동안 어색한 여운이 그 텍스트에 단단히 박힌다. 그 후 영원히 그 말을 사용할 때마다 자꾸 그날의 어색함이 떠올라서 움찔거리게 되는 불치병이 생긴다.
하고 싶은 말은 분명히 있는데, 글이 술술 써지지 않는 날이 있다. 마치 가려워서 긁고 싶은 부위가 있는데, 어디인지 몰라서 답답한 환상통처럼, 이런 현상은 나를 답답하고 짜증하게 한다. 말을 좀 더 정교하게 적고 싶을 뿐인데 내 뇌는 테이저건을 맞은 듯 가눠지지 않아, 결국 펜 던지고 잠시 미루기로 한다. 그저 글이 쓰고 싶으면 생각 없이 아무거나 적으면 된다. 하지만 미루는 이유는 의도적으로 감성적인 글을 쓰고 싶어서가 아니다. 최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확히 표현하기 위함이 1순위이며, 이를 위해 자신의 생각과 가장 흡사한 어휘를 알맞게 변용하여 정확한 위치에 설계하는 것이 글쓰기라고 생각한다. 그 점에서 시를 감상하는 것과 과학기술 논문을 독해하는 것은 99.9% 궤를 같이한다. 따라서 관념적 세계에 있는 생각을 텍스트의 차원으로 손상 없이 이동시키면 흔히 사람들이 '감성적'이라고 불리는 글처럼 풍성하고 예쁜 말이 된다. 결국 뇌에서 말을 추출하여 구김 없이 종이에 발라 붙이기를 잘하는 것, 즉 논리적 작문의 능력을 향상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예를 드는 습관을 줄이자
예를 드는 서술방식은 사례를 제시하고 상대방이 그 사례를 통해 그 개념을 귀납적으로 체득하게 한다. 사례를 남발하는 이유는 그 내용의 본질을 설명할 작문능력이 달리기에 사례로 설명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설명할 때 예를 들기보단,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예를 드는 게 반드시 안 좋다는 게 아니다)
전날 어떤 글을 쓰고 되게 잘 썼다고 만족하지만, 다음날 다시 보면 너무 보편적이거나 지나치게 과한 표현들로 보일 때가 많다. 그래서 글을 재구성할지 말지를 고민하는 나를 보면 내가 그렇게 비판하던 완벽주의자와 거의 흡사하기에 못과 망치를 들고 나를 고정하려는 나를 간신히 말리고 또 자위한다. 후회되는 경험을 재인식하여 깨달음을 추출하는 것은 '나 자신을 비판하고 반성한 후'를 전제로 하는데, 자존을 지하 감옥까지 끌어내리고 가두어 본 나에게는 그것이 언제 다시 내 자존을 구속할지 모른다는 트라우마이기에, 반성을 하려던 뇌에 '아 맞다 반성하면 안 되는데'가 번쩍 떠오르며 소스라치게 놀라 주의를 다른 쪽으로 인위적으로 고정시키는 것이 나의 자존을 지키는 불량한 습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