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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현 Oct 06. 2020

"공허함 속에서
존재를 드러내는 진동"

독립출판물 <진동하는 것들> 서평

독립출판 소설집 <진동하는 것들>의 서평을 공유합니다.

인디펍 카페의 aube님께서 남겨주셨습니다.

책을 끝까지 세심하게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전문은 아래 링크에 있습니다.


https://cafe.naver.com/comidp/3367





마음은 끝없이 팽창해서 우주의 끝에 이르렀다 다시 수축하기 시작했다. 거대했던 마음이 다시 아주 작은 점이 되었을 때 나는 아무것도 기억할 수가 없었다. 우주는 적막했다. 그렇지만 곧 새로운 진동이 나타날 것 같았다.

이인현, 『진동하는 것들』, 2020, p.156.


'진동'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흔들려 움직이다.' 작가는 자신이 본 세계를 통해 진동한다. 진동은 울림이 남기 마련인데 작가가 남긴 울림은 점차 나에게도 퍼져온다.


이 책은 10월의 날씨와 닮아있다. 10월의 날씨는 다소 건조하고 쌀쌀한 기운이 몸을 감싼다. 그 서늘함 사이로 은은하게 닿아오는 햇살은 어딘가 모르게 포근하고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다소 건조해 보일 수 있지만 한 줄기의 햇살을 품고 있다.


이 책은 차례로 '물든 밤', '천천히 썩는', '나는 너의 바깥에서', '진동하는 것들'이라는 제목을 가진 4편의 짧은 소설로 구성되어 있는 단편 소설이다.          



어두운 밤도 사실은 짙은 파란색이라고 하더라고요. 밤에 내리는 비는 밤의 색깔을 가지고 있다고요. 동생이랑 저는 그때부터 비 맞는 걸 좋아하게 됐어요. 흠뻑 모든 게 다 젖을 정도로 비를 맞고 어딘가를 통과하면요. 비가 밤의 색을 가지고 와요.

위의 책, p. 33-34.


지붕을 닫고 불을 꺼서 완벽한 어둠을 만들었다. 바닥에 앉아 비가 천장을 두들기는 소리를 들으면 온몸에 비의 무게가 느껴지는 듯했다. 눈을 감고 천문대가 있는 산 전체를 뒤덮는 비를 그렸다. 비는 한 방울도 내 몸에 닿을 수 없다, 지금 이 곳은 안전하다, 어떤 것도 나를 해칠 수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며 온 세상이 푹 젖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밤의 색으로 물들기를 바랐다.

위의 책, p. 43.


밤은 내게 친숙한 존재이다. 영감과 두려움을 동시에 지니게 한다. 예술을 시작하고 난 후, 밤을 지새는 날이 많아졌다. 밤은 새벽 특유의 냄새를 가지고 있는데 서늘한 공기 속에 배인 향과 바람에 의해 나뭇잎이 스치며 나는 소리는 나를 물들인다. 비가 오는 날은 밤의 색이 더욱 짙어진다. 물기에 젖어들었기 때문일까. 밤에 젖어들다보면 나는 홀린 듯이 무언가를 표현해내기 시작한다. 창작의 동력이 된다. 밤은 고요하다. 밤을 지새는 날들이 많아지면 우울함이 찾아오기도 한다. 내가 예술을 지속하게 하지만 나를 조금씩 갉아먹기도 한다. 그렇기에 나는 밤을 쉽게 놓지 못한다.


파란색은 여러가지 의미를 지닌다. 대표적인 것이 차분함과 우울함이다. 색이 짙어지면 그 의미도 깊어진다. 이런 면에서 파란색은 밤과 지나치게 닮아있다.


낯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가족석에 앉아 있는 엄마를 생각했고, 돌아오지 않을 순간들을 보내고는 또 후회만 남겼다는 게 나를 서글프게 했다.

위의 책, p. 81.


'엄마'라는 두 글자는 사람을 가장 유약하게 만드는 단어가 아닐까.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별 것 아닌 말에도 '엄마'가 섞이면 가슴이 울컥이고 눈물이 비집고 나온다. 나는 '엄마'를 소재로 한 모든 것에서 무너지지 않은 적이 없었다. 미안함과 고마움이 점철되어 내 안을 가득채웠기 때문일까. 그렇기에 내게 '엄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착한 딸이 아니라서 모진 말을 내뱉기도 하고, 도움을 청하기 위해 저 마음 깊숙이 꽁꽁 숨겨놓았던 아픔을 꺼내보이기도 한다. 그 모든 것은 엄마를 후벼팔 것을 알면서도 순간을 피하지 못했고 필연적으로 후회가 뒤따른다.


이제 엄마가 아닌 내가 엄마를 품을만큼 나이를 먹었다고 생각했는데 엄마를 담기에는 내 그릇은 여전히 작기에 구슬픔만이 남는다.          


풍전씨. 제가 당신을 실제로 만날 일이 없다는 건 큰 행운입니다. 그래야 이렇게 당신을 걱정할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당신을 실제로 보게 된다면 저는 아마 당신을 혐오할 겁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이렇게 떨어져 있는 것은 행운이라 말하는 겁니다. 이렇게 당신의 바깥에서 당신의 존재를 걱정합니다.

위의 책, p. 116.


현대인들은 쉽게 자신의 곁을 내어주지 않는다. 내가 살아갈 길이 바빠서, 나도 힘들어서, 누군가를 돕기에는 내 마음이 가난해서. 하지만 쉽게 걱정하지 않고 쉽게 걱정한다. 이 모호한 문장을 설명하기에 '당신의 바깥'이라는 문장은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하다.


삶을 살아가면서 맞닿아 있는 누군가에게 손내미는 것은 왠지 부담스러워 애써 외면하게 된다. 하지만 누군가의 바깥에서 걱정하고 돕는 것은 앞서 말한 것보다 어렵지 않다. 접점이 없는 누군가를 위해 정기 후원을 하고 시간을 내어 어딘가로 봉사하러 가는 사람은 꽤나 많다. 무심하게 지나치는 과정은 후회를 자아내는데 그것을 해소하기 위한 무의식적인 방어기제일 수도, 거리감과 속내의 따뜻함에서 비롯된 순수한 걱정일 수도 있다.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우리는 '바깥'에서 어떤 존재를 걱정하는 일이 더 많다는 것이다.          




이 소설들은 어떤 시절을 담고 있다.
다행히도 나는 그 시절을 봉할만한 적당한 용기를 찾았다.
용기는 그릇이기도 하고 씩씩하고 굳세며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기도 하다.
밀폐되지 않은 용기 덕분에 시절은 이제 천천히 썩어갈 것이다.

위의 책, 작가의 말 中.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굉장히 불편했다. 글을 읽어 내려가면서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하고 마음 한 구석이 찌릿하기도 했다. 인물을 나에게 투영한 까닭일까, 그 인물이 나였을지도 모르기 때문일까.


문장이 너무 솔직해서, 솔직하게 그려낸 그것은 내 것과 닮아 있어서, 드러내고 싶지 않아 꽁꽁 숨겨 감춰둔 내 속마음을 들킨 기분이라서 같은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상처를 주고받는다. 그 상처 속에는 후회도 담겨있다. 상흔의 깊이도 각기 다를 것이다. 어떤 상처는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이는 것만으로도 치유되지만 또다른 상처는 피가 철철 흐를만큼 깊어 시간이 꽤나 소요될지도 모른다.


'천천히 썩어간다.' 후회와 근심의 시간이 너무 괴롭지 않게 천천히 흘러가고, 기억해야 할 것을 단번에 잊어버리지 않게 천천히 되새기고, 시절이 곪아 형체를 잃어버리지 않게 가끔 들여다 보면서 천천히 썩어갈 것이다.


찬찬히 소설을 읽다보면 주변의 소음이 흐려지고 귓가엔 적막만이 남는다. 그리고 책 장이 한 장, 한 장 더해질 수록 그 적막은 너무나도 시끄럽게 고막을 때려 귀가 먹먹해온다. 공허함 속에서 존재를 드러내는 진동은 작지만 선명하고 울림은 또다른 울림을 만들어 그 저릿함은 꽤나 진한 흔적이 남는다. 작가 이인현이 만든 진동, 그것으로부터 퍼져갈 파장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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