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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hai park Sep 28. 2020

<테넷>

가까스로 이름값은 해낸다

<메멘토>부터 <덩케르크>까지 크리스토퍼 놀란의 필모그래피는 매번 많은 후일담을 생성한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다 못해 아무렇지 않게 만드는 그만의 세계관과 연출력은 수많은 마니아를 만들었다.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도는 물론, 비평가들의 긍정적 평가도 그를 따라왔다. 블록버스터의 토양 위에 고집과 뚝심으로 이뤄낸 그의 작품들은 그를 시대의 거장으로 만들었다. <테넷> 은 그의 11번째 작품이다.




코로나에 전면전을 선포하며 개봉한 <테넷> 은 시간의 역행에 대한 이야기다. <인셉션>이나 <인터스텔라> 만큼이나 어려운 개념과 단어들이 등장한다. '인버전'이니 '엔트로피' 니 하는 단어들. 이 단어의 뜻을 해석하고 개념을 이해하려 하면 안 된다. 나무에 집중하다 자칫 숲을 놓쳐버리게 된다. 어쨌든 이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을 따라가며 감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단번에 알아차리기 힘든 줄거리는 다소 불친절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시간을 무너뜨리고 다시 조합하는 그의 장기는 <테넷>에서도 여지없이 발휘되는데, 이번에는 그 정도가 더 심해졌다. 아마도 이 영화에 대한 호불호는 여기서 갈릴 것이다. 지나치게 복잡해서  불호인 사람들과 그 복잡한 플롯에 열광하며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로 나뉠 것이다.


놀란의 전작들이 제아무리 복잡스럽다 한들 집중하고 보면 영화의 큰 줄기를 따라가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결말을 두고 다양한 의견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테넷> 은 그렇지가 않다.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기엔 설명이 부족하다. 영화의 스토리를 주저리주저리 떠벌리듯 연출할 필요는 없겠으나, 최소한의 이해와 공감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테넷> 은 일련의 사건들과 상황을 나열하며 설득시키고 있는데, 그 사건과 상황의 동기조차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 있다. 그러다 보니 보는 내내 '도대체 왜 어째서 무엇을 위해' 이런 생각이 계속 든다. 영화 속의 과학적인 내용들을 이해하고 말고는 둘째 문제다. 결국 이야기, 서사의 문제다.


서사가 빈약하니 사람들은 계속 미로 같은 시간여행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인셉션>이나 <인터스텔라>에 있었던 가족애나 휴머니즘 같은 보편적인 정서가 없다. 양자물리학이 뭔지 정확히 잘 몰라도 <인터스텔라>는 재밌게 볼 수 있었다. 이게 누구의 꿈속인지 조금은 헷갈려도 <인셉션>의 감상에 큰 무리는 없었다. 기본적인 '드라마'와 서사가 있었고 덕분에 복잡한 시간여행을 지루하지 않게 할 수 있었다. <테넷> 은 시간의 재조립에만 힘을 쓴 나머지 이야기의 조립에는 실패하고 만다. 사람들로 하여금 영화를 감상이 아닌 해석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아마도 <테넷> 개봉 후 영화를 다루는 다수의 유튜버들은 조회수가 심심치 않게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해서 굳이 이해하려 노력해야만 하는 것인가.


그럼에도 이 영화를 굳이 극장에서 봐야 되는 이유는 당연하게도 영화의 스케일에 있다. 블록버스터라는 경기장에서 자기 자리를 굳건히 지켜온 베테랑답게 볼거리는 확실히 주고 있다. 하지만 이것도 결국 자본의 힘이 아니겠는가. 눈이 호강할만한 시각효과나 특징 있는 액션 시퀀스는 없다. 다만 인버전을 소재로 한 액션씬은 (차량이 거꾸로 간다거나, 무너진 건물이 다시 세워지는 것) 나름 인상적이었다. 이러한 부분이 크리스토퍼 놀란의 이름값을 겨우 유지해주고 있다. 하지만 그게 다다. 몇몇 장면들 때문에 이 영화를 되도록이면 큰 화면에서 봐야 하는 당위성이 생기기도 하지만, 이 영화가 힘든 발걸음을 보상해 줄지는 미지수다. 아마 사람에 따라서 크게 의견이 갈릴 것이다.


<테넷> 은 어쩔 수 없이 N차 관람을 강요당하는 영화다. 여러 번 보다 보면 영화의 '찐 스토리'를 파악할 수 있겠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영화가 좋아서 여러 번 보는 것이 아니라 이해가 안돼서 여러 번 본다는 것이 과연 나의 취미 생활에 유익한 일일까.


영화 속에 나오는 대사 중에 이런 게 있다. "이해하지 말고 느껴라" 아마도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아닐까. 영화를 보고 난 후 이뤄질 지루한 토론을 마치 예상이라도 하듯 말이다. 하지만 느낄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이해가 되는 건 더더욱 없다. 그의 말대로 이해하지 말고 느끼려 했으나, 그런 게 없다 보니 결국에 사람들은 다시 이해하려 안간힘을 쓰다 영화는 어느새 끝나고 만다. 이해하지도 느끼지도 못한 채.



훌륭한 건축물은 좋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빼어난 구조가 기막힌 스토리를 만나 하나의 건축물을 넘어 예술의 경지에 이른다.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건축공학적으로 잘 지어진 건물이라 한들 아무런 내용이 없다면 사람들은 이 건물에 대해 계속 궁금해할 것이다.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만들었지' 라면서 말이다. 구조에 대해 해석하려 할 테고, 결국 감상할 수 없는 무의미의 덩어리로 남을 뿐이다.  뜬금없지만 <테넷>을 보고 불현듯 스쳐간 생각이다.


ps: 앞으로 로버트 패틴슨의 행보에 주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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