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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hai park Oct 31. 2020

<남매의 여름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가족이란 영화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소재이다. 부모와 자식, 부부관계, 형제들 간의 이야기. 여러 형태의 다양한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진다. 영화의 시작은 하나의 관계에서 출발하지만, 결말은 언제나 가족 전체를 아우르는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영화에서 또는 문학 작품에서 가족의 이야기를 오랫동안 자주 하는 건 다룰만한 소재가 없어서는 아닐 것이다. 나를 제외한 사람 중 가장 나와 닮은 사람들.  가족이란 두 글자만 들어도 마음 한 구석이 저미는데, 이게 참 복잡스러운 감정이다. 마냥 사랑할 수도 또 마냥 미워할 수도 없는, 분명 내 가족이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참으로 어려운 관계다. 그렇지만 함께한 공간과 시간 그 세월의 두께가 수많은 감정들을 지긋이 끌어안는다. 우리에게 집과 가족이란 그런 의미다.




 <남매의 여름밤>도 그런 평범한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다. 제목과 달리 이 영화는 남매의 이야기만을 다루지 않는다. 남매의 이야기에서 시작되고 있지만 결국 가족 구성원 전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이 영화에는 두 남매가 등장한다. 누나 옥주와 동생 동주. 그리고 둘의 아빠와 아빠의 여동생(옥주와 동주에게는 고모). 4명의 가족은 각자의 사정으로 인하여 할아버지(아버지)의 집에 같이 머무르게 된다. 그렇게 여름날을 함께 보내게 된다. 한 공간 안에 유년에서 소년, 청년에서 중년 노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삶의 단면들을 보여준다. 철이 없는 동주와 생각이 많은 옥주, 어깨가 무거운 아빠와 어딘가 외로운 고모. 그리고 육신이 쇠약한 할아버지. 영화 속에 등장하는 가족들은 우리가 흔히 만나는 일상의 얼굴들이다. 결코 잘나지도 않고 모나지도 않은 평범한 사람들. 다들 한두 가지씩 상처는 안고 있지만, 얼굴에 빛을 잃지는 않은 사람들. 이 영화의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영화 같지 않아서 오히려 영화답다.


<남매의 여름밤> 은 각 세대에서 느낄 수 있는 보편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들을 풀어놓는다. 그리고 풀어놓은 문제들을 집으로 들여와 봉합한다. 콩국수를 먹고 수박을 먹으며, 방울토마토와 포도를 따며, 할아버지의 생일을 축하하며. 오래된 이층 집은 그렇게 가족들에게 일용할 양식과 영혼의 치유를 제공한다. 우리가 집과 가족을 통해 위안을 받듯 <남매의 여름밤> 도 집이란 공간을 적극 활용한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할아버지 혼자만 있던 집에 가족들이 모인 시점부터 집은 집다워지기 시작했다. 집 안에서는 그 어떤 부정적인 마음들도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었다. 하나의 생명이 그 집을 떠나갔을 때 그때서야 집 안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 영화의 발화(發話)가 인상적이다. 영화는 결코 어떤 감정이나 메시지를 주장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가족들의 일상을 보여줄 뿐이다. 가족들의 일상도 특별할 게 없다. 앞서 상술했듯이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물론 각자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있지만, 그만한 아픔조차 없는 사람은 없다. 영화는 가족들이 겪는 고민과 문제들을 전면적으로 내세우기보다는 그냥 담담히 들려주는 쪽을 택하고 있다. 소리 내어 얘기하지 않아도 그저 눈빛과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는 가족들처럼 말이다. 이 이야기들이 하나하나 모여져 서서히 감정을 응축시키고, 마침내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의 옥주를 통해 폭발한다. 그저 조용조용히 일상적인 얘기를 했을 뿐인데 울림이 굉장히 크다.


<남매의 여름밤>이 인상적인 이유 또 하나는 이 영화의 계절적 배경이다. 왜 하필 여름밤이었을까. 많은 계절 중에 왜 굳이 여름이었을까. 감독의 정확한 의도는 모르겠지만 결론적으로 이 선택은 아주 성공적이다. 여름방학, 할아버지의 이층 집, 쏟아지는 햇빛, 마당과 텃밭, 재봉틀 등등. 등장하는 모든 배경과 소품들은 <남매의 여름밤>이라는 제목을 정확하고 세밀하게 표현해주고 있다. 이는 곧 어느 시절의 어떤 기억을 끄집어 내게 하는데, 영화의 핵심 주제와는 별개로 감상의 폭을 더 넓혀주는 역할을 한다. 굳이 여름이 아니어도 가족의 이야기는 유효했겠지만 여름이라는 계절을 택함으로써 더욱 깊고 진한 여운을 주는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난 후 계속 이어지는 잔향은 결국 이 여름밤의 분위기다. <남매의 여름밤> 이 수많은 가족 영화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도록 기억에 남는 건 계절을 통째로 스크린에 옮겨 놓은 덕분이다. 이 영화의 메시지는 소리 없이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지만 여름의 분위기만큼은 아주 강력하게 소리 내어 담아내고 있다.



외아들인 나는 어렸을 때부터 형제가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특히 형이나 누나가 있는 집이 부러웠다. 내가 이런 얘길 하면 친구들의 반응은 거의 비슷했다. "난 네가 더 부럽다. 난 맨날 형(누나)이랑 싸워" 그래도 난 그들이 부러웠다. 뭐 좀 싸우면 어떤가. 형제끼리 남매끼리 가족끼리 그럴 수도 있지 않나. 서로 치고받고 싸워도 '미안해' 한 마디에 아무렇지 않게 라면을 먹는 옥주와 동주처럼, 집 문제로 티격태격해도 아버지를 위한 일에는 한 마음인 아빠와 고모처럼. 어쨌든 그런 가족이 있다는 건 제법 든든한 일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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