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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hai park Nov 28. 2020

<자기 앞의 생>

삶은 계속되어야만 한다.

한 소설가가 있다. 이름은 '로맹 가리'. 프랑스 국적의 유대인인 그는 1941년부터 여러 소설을 발표하며 작가로서 명성을 쌓았다. 여러 작품 중 <하늘의 뿌리>가 1956년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콩쿠르상을 수상했다. 이 콩쿠르상은 원칙상 같은 작가가 두 번 수상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그가 집필한 <자기 앞의 생>으로 1975년에 한 번 더 콩쿠르상을 수상한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자기 앞의 생>을 발표했다. 이 소설은 당시 프랑스 문학계에서 엄청난 찬양을 받았는데, 에밀 아자르가 곧 로맹 가리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80년 그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후 6개월이 지나 그의 유서를 통해 에밀 아자르가 곧 로맹 가리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죽음을 앞두고서야 정체를 밝힐 수밖에 없었던 이 비운의 작가의 속사정은 무엇이었을까. 소설 <자기 앞의 생> 은 작가의 일생을 생각하며 읽으면, 읽고 난 후의 여운이 더 진하게 남는다.


<자기 앞의 생>의 주인공은 14살 고아 소년 모모다. 모모가 로사 아줌마의 집에 살게 되면서 일어나는 일을 담고 있다. 모모와 로사 아줌마의 관계를 중심으로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인물들의 이야기와 삶의 풍경들이 모모의 시선으로 담담하게 그려진다.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은 주로 사회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다. 고아, 매춘부, 외지인, 유대인, 아랍인, 범죄자 등 사회의 경계나 외부에 있는 사람들이다. 모모의 집주인 로사 아줌마는 매춘부의 아이들을 돌봐주며 근근이 생활하고 있다. 이들을 바라보는 모모의 시선은 담담하다. 하지만 그 담담한 시선 속에 삶의 아름다움이 녹아 있다.


14살 소년의 시선처럼 이 소설은 인물들에 대해 함부로 평가하기를 거부한다. 소설은 인물들의 다름에 대해서 강조하지 않는다. 세상적으로, 사회적으로 어딘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그냥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줄 뿐이다. 이것이 작가가, 모모가 그들을 바라보는 마음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를 생각해보자. 누군가 어딘지 모르게 달라 보여도 어렸을 때는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어른의 옷을 입으면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나도 모르는 색안경을 끼게 된다. 그런 어른의 생각이 나의 인생만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는 독단에 빠지게 만드는 것 아닐까.


<자기 앞의 생> 은 모모의 눈을 통해 모든 사람의 (그 어떤 사람이든) 자기 앞에 주어진 삶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음을 얘기하고 있다.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왔으며, 지금의 모습이 어떠하더라도 우리 앞에 삶은 의미 있게 계속 흘러가는 것이다. 그리고 인생의 아름다움을 완성하는 것은 결국 '사랑'이라는 것을 <자기 앞의 생> 은 얘기하고 있다. 다른 모양의 사람들이 서로를 의지하며 버텨내는 삶의 아름다움이 이 소설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삶이란 결국 로사 아줌마와 모모처럼 하나의 존재에서 다른 존재로 이어지는 것. '자기 앞의 생' 이란 말은 비단 '우리 혼자만의 생'을 얘기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 <자기 앞의 생> 이란 소설이 얼마 전에 넷플릭스를 통해 영화로 제작되어 공개되었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은 소설의 명성에 조금도 따라가지 못하는 일이 많다. 나는 그래서 감명 깊게 본 책들이 영화로 제작되면 의도적으로 관람을 하지 않기도 한다. <눈먼 자들의 도시> 같은 참상을 피하기 위해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위대한 개츠비>의 경우도 그렇다. 어쨌든 우려 가득한 마음을 안고 <자기 앞의 생> 영화 버전을 넷플릭스를 통해 관람했다.


우려 가득한 마음은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원작 소설의 명성에 따라가기는커녕 도리어 먹칠을 하고 있다. 원작 소설이 삶의 아름다움과 깊은 통찰을 보여주며 명작 반열에 오른 반면에, 영화는 그저 그런 휴먼 드라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불량한 고아 소년이 억세고 까칠한 할머니를 만나 개과천선하게 된다는 평범한 스토리는 2020년 현재에 더 이상 감동을 주기 힘들다. 단편적이고 일차원적인 내러티브는 소설의 그 복잡 미묘한 감정을 전혀 소환해내지 못하고 있다. 원작 소설을 덜어내고 이 영화를 그냥 원작 영화라고 생각해봐도 지나치게 평범하다.


원작 소설에서 모모가 보고 그렸던 세상은 온 데 간데없다. 모모의 탈선과 급작스런 변심만 있을 뿐이다. 영화 <자기 앞의 생> 은 원작 소설이 가지고 있는 훌륭한 서사를 반의 반도 다 못 담고 있다. 때문에 소설을 모르고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등장인물들의 감정에 공감을 하지 못할 공산이 크다. 물론 소설의 방대함을 짧은 2시간 안에 다 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리고 상당 부분 각색을 한 부분도 있다. 하지만 감정의 최소 마지노선을 달성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살짝 모자란 느낌이다. 영화 <자기 앞의 생> 은 평범한 드라마로서 소설만큼의 탁월한 감동이나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실패한다. 그냥 그런대로 무난하게 감상할 수는 있지만, 원작과 비교해 봤을 때 굳이 시간을 내어 볼 필요까지는 없어 보인다.


이런 와중에 홀로 빛을 발하는 건 여배우 '소피아 로렌'이다. 영화 속에서 로사 아줌마 역할을 맡은 그녀는 남다른 존재감을 보여준다. 소설을 보며 상상했던 이미지와는 좀 괴리가 있었다. 상상했던 로사 아줌마는 후덕하고 조금은 무게가 나가는 노년의 여성이었다. 그러나 소피아 로렌의 로사 아줌마는 나이는 먹었지만 굉장히 세련된 이미지다. 비록 상상했던 모습과는 달라도 그녀는 역시 전설적인 여배우임이 틀림없었다. 노년의 소피아 로렌은 처진 피부와 피로한 눈빛을 앞세워 삶의 막바지에 처한 사람의 심정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 죽음이 멀지 않은 순간에 느끼는 두려움과 공포, 후회와 슬픔, 다음 세대를 향한 애정까지 마치 자신의 이야기인양 연기하고 있다. 이 영화를 꼭 봐야 한다면 그건 바로 대배우 소피아 로렌 때문이다. 하지만 원작에 로사 아줌마 캐릭터와의 싱크로율은 여전히 미지수로 남는다.




로맹 가리는 <자기 앞의 생> 이후로도 몇 개의 작품을 더 발표한다. 가짜 에밀 아자르 역할은 그의 5촌 조카의 몫이었다. 이후의 작품들은 비평가들에게 호된 비판을 받는다. 비평가들은 조카 에밀 아자르의 작품을 따라 한다며 로맹 가리에게 거센 비판을 퍼부었다.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작가이지만, 정작 자신의 삶은 그렇게 아름답지 않은 것이었나. 로맹 가리는 1980년 12월 2일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하지만 삶은 계속되며 이어진다. 그리고 계속되어야만 한다. 위대한 작가는 위대한 작품을 남겼다. 예술가의 안타까운 죽음은 역설적으로 삶의 의미를 일깨워 주기도 한다. 누군가의 삶과 죽음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자기 앞의 생' 은 '우리 모두의 생'으로 이어지며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으로 연결될 때 삶은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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