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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hai park Feb 27. 2021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뜻밖의 감성팔이

2016년 5월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사망 사고가 발생했다. 스크린 도어에 사람이 끼어 죽었다는 것이다. 이 끔찍한 죽음의 피해자는 스크린 도어를 수리하던 수리업체 직원이었다. 그는 서울메트로의 하청업체에서 근무하는 근로자였는데 꽃다운 나이에 그만 안타까운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고 갔지만 이 사고는 결국 원청과 하청의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일어난 사고다. 사건 당일에도 피해자는 서울메트로와 (본인이 소속된) 하청업체와의 불평등하고 불합리하고 모순적인 계약 때문에 현장으로 달려 나갈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런 일은 대한민국에서 비일비재하다. 원청에서 제공되는 일이 전부인 하청업체 입장에서는 원청의 갑질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할 수밖에 없다. 열악한 근무환경, 적은 임금 등은 하청업체 소속 직원들에게 그대로 전가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청업체 근로자들의 권리는 갈 곳을 잃어버리고 만다. 소속되어 있는 하청업체에서는 '우리는 권한이 없다'라고 하며, 원청에서는 '우리는 책임 없다'라고 한다. 그 사이에 수많은 근로자들은 아직도 위험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


하청업체에서 하는 일들은 청소, 경비, 안전관리, 정비, 수리, 콜센터 등등 주로 육체노동이다. 물론 원청 직원들이 하는 일도 중요하고 어려운 업무일 것이다. 하지만 급여 차이가 몇 배 이상 차이 날 정도로 업무의 강도가 다른 것인지 의문이다. 결국 원청-하청이라는 기이한 노동 형태가 빚은 우리 사회의 씁쓸한 현실이다. 과연 하청업체 근로자들의 '진짜 사장'은 누구일까.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는 이런 하청업체 직원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박정은 대리(유다인 배우)는 원청에서 하청으로 파견을 나온 근로자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거의 쫓겨나다시피 먼 타지로 온 그녀. 말이 파견이지 사실 해고나 다름없었다. 누구나 다 아는 상황 속에서 그녀는 기어코 다시 원청으로 복귀하겠다며 몸부림을 친다. 여자의 몸으로 송전탑에 오르기까지 하는 등 남자들도 하기 힘든 육체노동을 기어코 해내고 만다. 원청에서 기약한 1년이 다 되어가고, 그녀는 다시 원래 회사로 돌아갈 수 있을까.


영화는 원청 직원과 하청 직원이 함께 일하는 불편한 상황을 통해 하청업체 직원들의 현주소를 그리고 있다. 본인이 입는 작업복도 회사에서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내돈내산' 해야 하는 열악한 환경이다. 회사에서 받는 월급 가지고는 가족들을 부양하기 힘들어 알바까지 뛰어야 하는 현실이다.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여러 장면들은 그야말로 짠하기 그지없다. 간접적으로나마 하청업체에 소속된 근로자들이 얼마나 힘든 상황에 있는지 느끼게 해 준다.


하지만 이 영화는 거창한 제목과 다르게 지나치게 감성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아주 개인적인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는 불합리한 근로 환경에 대한 진지한 접근보다는 한 개인이 자기 앞에 놓인 모진 현실을 극복해 나가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영화의 핵심이 원청 직원 정은의 개인적 서사에만 집중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 영화는 어느 순간 감성적, 낭만적이 되어버린다. 선전포고와 같은 제목과는 어울리지 않게 영화의 질감은 매우 말랑말랑하다.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에서 해고를 빼고 '나는 나를'에 집중한 모양새다. 영화 속에서 하청업체 근로자들의 열악한 환경은 직접적인 언급을 통해 나열이 된다. 감정적인 동요는 불러일으키지만 그 이상은 나아가지 못한다. 결국 한 개인의 자존감 회복으로 귀결되는 스토리는 이렇게까지 거창한 제목이 필요했나 싶을 정도다. 또한 현실 고발을 위해, 그리고 정은의 서사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억지스러운 설정과 극단적인 캐릭터가 연출되는데 이는 영화의 가장 큰 단점이다.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는 기세 등등하게 시작해 뻔한 감성으로 마무리된다. 켄 로치나 다르덴 형제의 그것을 기대했다가 그만큼의 실망만 안겨준 영화다. 그럼에도 영화가 근로자들의 현실을 보여주려 했던 그 노력은 박수를 쳐주고 싶다. 아쉬운 결과물이지만 이런 영화라도 감사한 마음이다. 그리고 주인공 박정은 대리 역할을 맡은 유다인 배우도 인상적이다. 갑작스러운 파견으로 인한 수많은 감정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송전탑과 전선을 타는 그녀의 육체노동 연기도 놓칠 수 없는 포인트다. 만년 유망주에 가까웠던 그녀가 이제는 조금 더 주목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반면에 그녀와 오정세 배우를 제외한 나머지 출연진들의 연기는 (이런 말은 좀 미안하지만) 차마 말하기 힘든 수준이다.  



원청과 하청, 정규직과 비정규직. 두 집단을 둘러싼 논쟁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다. 몇 년 전에 한국 도로공사, 작년에 인국공 사태, 최근에 건강보험공단 콜센터 상담사들의 파업까지. 몇 년 동안 공부해서 시험 보고 공기업에 들어간 사람들. 몇 년 동안 열악한 환경과 최저임금에 허우적대는 사람들. 누군가는 형평성에 대해 얘기한다. 또 누군가는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얘기한다.


하지만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 문제이며, 언젠가는 고치고 바뀌어야 할 구조적 문제인 것이다. 결국 우리의 자녀들이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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