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잡탕밥
마블, 정확히 말하자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세계관과 역사는 이제 4막에 올랐다.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은 지난 7월에 개봉한 <블랙 위도우>에 이은 마블 페이즈4의 두 번째 영화다. <블랙 위도우>가 지난 10여 년간의 세월을 정리하고 떠나보내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물론 플로렌스 퓨가 연기하는 위도우의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은 페이즈4의 선두주자가 되는 작품이다. 크고도 큰 그림의 또 다른 페이지 그 서막을 알리는 히어로라 할 수 있겠다.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은 MCU의 첫 아시안 히어로인 만큼 아시아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반영, 구현한 기색이 역력하다. 아시아라고 해봤자 동북아시아 그것도 거의 중국문화에 대한 fantasy가 이 영화에는 많이 녹아 있다. 한. 중. 일 3국의 입장에서는 각자 다른 문화임을 서로가 잘 알고 있고 자기 나라와 민족에 대한 자부심도 상당할 테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이 구분이 모호할뿐더러 애당초 큰 관심사가 아니다. '오리엔탈리즘'이란 이름으로 뭉뚱그려 존재할 뿐이다.
애초에 '샹치'는 그 탄생부터가 '이소룡:부루스 리'의 영향으로 탄생한 캐릭터다. 원작 만화는 1973년 쿵후 마스터의 능력을 가진 히어로로 처음 등장했다. 쿵후로 대표되는 중화권 영화에 대한 향수는 여러 할리우드 영화와 미국 문화에서 그 흔적들을 찾을 수 있다.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은 미국의 동양문화에 대한 판타지를 그대로 찍어다가 박제시킨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영화의 이런 동양적인 톤을 동양인의 눈으로 본다면 아주 구태의연하기 짝이 없다. 서양인들의 스테레오 타입을 그대로 옮겨 놓았는데, 이는 그동안 할리우드에서 표현했던 방식과 전혀 다르지 않다. 어떤 장면들, 집에 들어가기 전 신발을 벗는 장면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준다든지, 둥그런 식탁에서 3대가 같이 밥을 먹으며 결혼에 대한 잔소리를 늘어놓는다든지, 이런 장면들은 캐릭터와 영화의 정체성을 강박적으로 주입시키기 위함이 확실해 보인다.
하지만 이런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집착이 어설퍼 보이기보다는 어쩌면 정면돌파처럼 보이기도 한다. 식상한 복제는 눈살을 찌푸리지만 반면에 동양문화에 대한 판타지가 이 영화의 최대 장점인 액션을 보여주기엔 아주 적절한 매개가 된다. 쿵후의 대가라는 캐릭터에 맞춰 설계된 액션의 시퀀스는 이 영화의 가장 흥미진진하며 소중한 장면이다. 인간계를 초월하는 어떤 특별한 능력이나 힘이 없는 캐릭터인 만큼 이 영화의 액션은 주로 맨손 액션이 대부분이다. 물론 텐 링즈의 가공할만한 위력이 함께하지만 사실 백미는 영화 초반부에 버스와 마카오 건물을 배경으로 주인공 샹치가 벌이는 맨몸 액션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쿵후 시퀀스'는 이 영화가 다른 마블 히어로물과 차별성을 가지는 동시에 MCU 안으로의 안정적인 진입에 대한 기대를 가지게 한다. 이 중화권 히어로는 MCU안에서 여전히 그리고 아직까지는 이질적인 존재이지만, 잘 녹아든다면 세계관 안에서 나름 쏠쏠한 활약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이전 캐릭터들 못지않은 인기 캐릭터가 될 가능성도 충분히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마블이 <블랙 팬서>를 통해 범흑인 문화를 적극 수용하면서 보여줬던 긍정적 효과가 있듯이, 이 샹치라는 캐릭터로 인해 같은 문화권에 있는 사람들에게 동일한 효과가 나타나는 것도 충분히 있을법한 일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어린 시절이 많이 생각나기도 했는데, 8,90년대 홍콩 영화에 대한 추억이 있는 사람들은 아마도 비슷한 감정이 있었으리라 생각이 된다. 저 멀리 이소룡의 <정무문>부터 성룡의 영화들 이연걸의 <태극권>, 견자단의 <엽문>,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 주성치의 <쿵후 허슬>까지 주옥같은 무협영화들이 이 영화를 보면서 떠올랐다.
하지만 짜릿했던 맨몸액션이 지나간 후 이내 당황스러운 존재와 마주하게 된다. 영화의 후반부 샹치(시무 리우)는 아버지 웬우(양조위)의 마수를 막기 위해 신비의 마을 탈로로 향한다. 여기서부터가 실질적인 영화의 클라이맥스 부분이겠지만, 그 방향은 좀 뜻밖이다. 탈로를 배경으로 가족 간의 오해가 풀리고 주인공은 각성하여 히어로로 진화되는 전형적인 서사가 펼쳐진다.
영화의 빌런이라 생각했던 존재가 그렇게 깔끔히 사라진 후 주인공은 '상상도 못 한 정체'와 맞닥뜨리게 된다. 아니 상상 속에서나 있을법한 존재라 하는 게 맞을까. 영화는 타율 높은 맨손 액션을 포기하고 뜬금없이 괴수물로 방향 전환을 하는데 이는 심히 급작스럽다.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이 또한 동양적인 판타지의 구현이라 의심하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인다. 함부로 갈 수 없는 신비한 마을에 호수 안에 잠들어 있는 용과 같은 신령한 존재, 암벽 뒤에 봉인되어 있는 전설의 괴물. 그 괴물은 다른 것도 아닌 사람의 영혼을 먹고 산다. 아주 영적인 몬스터다. 괴물이 영혼을 먹는다는 설정은 오리엔탈 판타지의 극단을 보여주는 예다. 이러한 배경도 꽤 동양적인데 직접 괴수를 창조해 '크리처'로 보여주기까지 하니 이것이 판타지의 재현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고질라가 거기서 왜 나와)
영화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끔찍한 혼종' 이요 '잡탕밥' 같은 느낌이다. 쿵후와 괴수의 조합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기이한 궁합이었다.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은 마블이 맘먹고 아시아 시장을 겨냥한 작품이다. 페이즈4를 시작하면서 그들의 세계관을 정말 '리얼 세계'로 펼치겠다는 욕심이 들어간 작품이다. 그렇기에 <블랙 팬서> 때처럼 노골적으로 동양문화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고 있는데, 어색함과 반가움이 공존한다.
그래도 이 영화는 잘 짜인 액션의 시퀀스와 텐 링즈가 번쩍할 때마다 느낄 수 있는 시각효과가 두드러져 한 편의 장르 영화, 액션 영화로서 볼 가치가 충분하다. 무엇보다 새로운 캐릭터를 소개하고 새로운 페이지를 넘기는 이 시점에 매우 적절한 기획과 결과물이 아닌가 싶다. 잡탕밥이지만 꽤 맛있는 잡탕밥이다. 들어가는 재료가 비싸고 고급이라 그런가 아주 먹을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