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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ghai park Dec 27. 2019

<백두산>

제조공정에 충실한 공산품

공산품(工産品). 사전적 의미로는 공업적인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제품을 뜻한다. 과거에는 수공업으로 만들어진 제품들이 주를 이루었지만, 산업혁명 이후 기계공업의 발달로 이제는 공장에서 대량생산으로 만들어진다. 하나의 공산품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일련의 통일된 과정과 매뉴얼 등이 있다. 통일된 제조과정은 기본적인 품질을 보장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찾고 이용한다. 새로움이나 신선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이용 시 실패 확률이 적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선택을 받는다.


종합예술을 지향하는 영화에서도 이런 공산품 같은 영화가 존재한다. 정해진 공식대로 마치 공장에서 찍어내듯 만들어지는 영화들. 대개 할리우드 영화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다만 할리우드의 영화들은 그 숙련도가 상당해서 최고 수준의 공산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전 세계 영화팬들이 할리우드에 열광하는 이유다. 그리고, 그 공산품을 모방하려는 공산품들도 있다.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 매뉴얼을 그대로 따라 해 기본적인 품질만이라도 획득하고자 하는 여러 작은 제조업체들.


여기 <백두산> 이 그렇다. <백두산> 은 전자제품을 사면 들어있는 사용설명서처럼 그대로 따라 해 조립하여 만든 영화다. 이미 예고편과 포스터만 봐도 영화의 전개가 눈앞에 훤히 그려졌다. 하지만 이는 할리우드라는 공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할리우드는 그런 뻔하디 뻔함을 능가하는 압도적인 비주얼이 있었다. 결국 <백두산>의 관람 포인트도 그 부분이었다. 그래픽과 비주얼이 얼마만큼 이 영화의 단점을 극복하게 해 줄 것인지.



영화의 외피는 기본적으로 재난영화의 모양을 하고 있다. 백두산에서 화산이 폭발하여 한반도 전체가 위험에 빠진다는 내용이 기본 골격이다. 대단히 간단하고 황당무계한 설정이다. 말이 안 되는 설정이지만 이를 비난할 필요는 없다. 영화라는 게 꼭 말이 되는 이야기만 해야 될 이유는 없다.


영화는 어디서 많이 본듯한 설정들과 캐릭터의 나열로 일관한다. 재난이 일어나는 시점부터 끝나는 시점까지 할리우드의 재난영화 스타일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다. 영화의 배경만 한반도로 바뀌었을 뿐이다. 심지어 장면을 구성하는 한컷 한컷 까지 미국의 재난영화와 똑같이 닮았다. 롤랜드 에머리히의 <2012> 나 <투모로우>를 대사만 한국어로 바꿔서 찍은 느낌이다. 영화 초반에 도심 속에서 건물이 무너지는 장면이나 후반부에 백두산이 폭발하는 장면. 열거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모든 장면이 쌍둥이처럼 닮았다. 이 정도면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추종자가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다.


군인과 그의 아내. 지질학 박사. 대통령. 정부 고위인사. 문제 해결의 키를 쥐고 있는 미스터리 한 인물까지. 등장인물들 또한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 인물들은 최고의 공산품을 만들기 위해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 제작자의 요구에 충실히 하기 위해 어울리지 않는 유머와 눈물도 짜낸다. 마치 기계의 부품처럼 소비되는 인물들은 화려한 캐스팅이라고 떠벌렸던 홍보문구를 민망하게 만든다. 하지만 유명 배우들을 멀티캐스팅하는 것도 이러한 영화의 정해진 공식일 터. 그리고 몸집이 큰 영화일수록 캐스팅에 여러 이해관계가 섞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이제 이 정도는 그러려니 할 정도로 이미 내성이 쌓인 지 오래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하정우-이병헌 두 연기자의 호흡이다. 연기의 달인들 답게 무너지는 <백두산> 속에서 여러 명의 관객을 구출해내고 있다. 때론 그들의 연기도 부품처럼 소비되기는 하지만 탄탄한 연기의 내공으로 <백두산>에서 가장 볼만한 장면들을 만들어낸다. 이 외에는 볼만한 장면이 눈을 씻고 봐도 없다.


 <백두산> 은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영화다. 뻔하고 흔한 재난 영화에 한국인 특유의 신파적 감성을 조금 추가했을 뿐이다. 이 영화가 할 말이 없게 만드는 것은 완성도를 떠나서 정말로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아무런 감흥도 감정도 느끼지 못한 영화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렇다면 기대했던 비주얼은 어떨까. 물론 과거의 한국영화들과 비교했을 때는 상당히 괄목할 만한 발전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비주얼이 무너지는 <백두산>을 막지는 못한다. 역부족이다. 객관적인 기술력은 뛰어나지만 영화의 한 장면으로서는 제대로 작동 되지를 못한다. 이 영화의 그래픽은 <백두산>이라는 영화야 어찌 됐든 간에 본인의 장기만 뽐내면 된다는 식이다. 개인 기량이 아무리 좋다고 한들 팀플레이를 못하면 경기에서 이길 수 없다. 사실 그래픽만 따로 떼어놓고 봐도 2년 전에 나왔던 <신과 함께> 시리즈에 비해 나아진 점이 없다. 할리우드의 기술력과의 직접적인 비교는 무리겠지만, 적어도 2년 전에 나왔던 한국영화보다는 더 발전이 됐어야 한다.


<백두산> 은 열심히 따라 했건만, 그 결과가 원조 공산품의 발끝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최악이 아닌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모방'과 '답습'에 있다. 정해진 공식을 충실히 따라 조립한 영화는 기본적인 품질은 보장하고 있다. 도전보다는 안전을 선택한 기획의도는 나름 유효하게 먹히고 있다. 하정우-이병헌 두 배우의 덕을 많이 보고 있지만 그래도 <백두산> 은 의외로 끝 맛이 나쁘지 않다.




<백두산>에서도 그렇듯 최근에 한국 영화는 주. 조연 배우들의 활약이 영화의 완성도를 결정하는 일이 많다. 물론 연기자의 명연은 그만큼 영화를 한층 빛나게 해 준다. 하지만 최근의 한국영화들은 지나치게 연기자들에 의존을 하는 경향이 있다. 연출자의 연출보다는 캐스팅과 특정 연기자의 연기력에만 기대는 영화는 몇몇 공산품이면 족하다.




현대에는 기술의 발전으로 좋은 품질의 공산품도 많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획일화된 제품에 질리기도 하고 때로는 손때가 묻은 물건들이 그립기도 하다. 고도의 시스템은 영화도 하나의 상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스템대로 만들어지고 전시되고 유통되는 영화라는 상품을 부인할 수는 없다. 때로는 그 상품이 최고의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왕 만들어질 공산품이라면 그 시스템과 제조과정에 최대한의 노력과 노하우를 쏟아부어 최상의 결과물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ps: 쿠키영상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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