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윤미래가 여성 래퍼를 대표해야 하나
“여성 래퍼 베스트 3: 1위 윤미래 2위 T 3위 조단 엄마”
언젠가부터 인터넷에선 떠도는 유행어입니다. 알다시피, 저 세 명은 같은 인물이죠. 그만큼 윤미래는 독보적인 여성 래퍼로 대중에게 칭송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 유행어는 윤미래의 대단함이 아니라 여성 래퍼들의 입지가 왜소하다는 걸 뜻합니다.
윤미래는 과대평가된 래퍼입니다. 윤미래는 한국말 랩 가사를 직접 쓰지 않습니다. 힙합에서 가사를 쓴다는 건 작사 행위 이상의 크고 넓은 의미가 있습니다. 보통 래퍼들을 평가할 때, 가사의 깊이와 참신함, 스토리텔링, 펀치라인, 박자 감각과 플로우를 판단하지 않습니까. 래퍼가 가사를 쓴다는 건 메세지와 수사법을 고심하는 한편 발음하기 쉬운 자음과 모음을 고르고 마디 마다 글자수를 안배해 패턴을 이뤄내고 음수율을 형성하는 일입니다. 자신 만의 표현과 리듬을 설계하는 작업이죠. 가사 대필은 래퍼의 역량을 이루는 사항 대부분을 외주 하는 것이고, 남는 건 음색과 발성, 호흡 같은 하드웨어 밖에 없습니다. 윤미래의 타고난 하드웨어가 워낙 출중하니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것이지, 윤미래는 MC로 평가하는 것 자체가 곤란한 래퍼입니다. 그런데도 십 년 넘게 여성 래퍼의 대명사로 군림한다는 건 이렇다 할 족적을 남긴 여성 래퍼가 없다는 말이죠.
이건 여성 래퍼들의 잘못은 아닙니다. 힙합은 극남초 장르예요. 남성 뮤지션 숫자가 많은 것은 물론, 그 문화와 관습이 남성성을 예찬하고 과시하는 남성 중심주의입니다. 남성이란 개념은 여성이란 존재가 있기에 성립하는 것이고, 남성성은 여성성을 폄하하거나 남성에게 종속시키며 강조되기 마련입니다. 여성 MC들이 힙합으로 향하는 진입장벽은 높을 수밖에 없고, 여성들 숫자가 적으니 확률적으로 큰 성취를 이룰 수 있는 이들의 숫자도 적습니다. 기존 판의 인맥이 남성들 일색으로 짜여 있으니 커리어를 이룩하기도 불리하죠. 지난 시간 동안 언더 힙합 뮤지션들과 가장 많은 작업을 한 여성 뮤지션은 아마 보컬리스트 샛별일 겁니다. 이처럼 남성들과 대등하게 협업하는 여성 래퍼는 극히 드물었고 상큼한 목소리를 비트에 얹어주는 세션으로 섭외되었을 따름입니다. 몇몇 남성 래퍼들이 wack MC를 욕할 때 "언프리티 랩스타나 나가라. push 래퍼야"라고 하는 판국이니, 여성성에 대한 선입견이 진입장벽을 이룬다는 사실을 더 말 할 필요 없겠죠. 무엇보다 큰 문제는 남성적 언어로 형성된 장르에서, 여성 래퍼들이 자신의 서사와 캐릭터를 이룰 수 있는 전범과 자원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여성 래퍼들은 힙합이 여성을 소비하기 위해 허락한 제약되고 대상화된 역할을 빌리기 마련이죠. 남성 래퍼들이 여성을 ‘Bitch'라고 부르니까, 스스로 'Bitch'를 자처하고 혹은 그 말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전유하며 ’Bad Bitch'를 자처합니다. 이런 캐릭터는 근본적으로 남성의 시선을 통해 규정된 것이기에 자승자박이나 양날의 검이 될 수 있습니다. 00년대 후반 오버클래스에서 활동한 리미는 출중한 재능을 증명했지만 'Bitch'를 자처하다 그 캐릭터의 함정에 빠져 커리어에 타격을 입었습니다. 디스랍시고 성적 모욕을 퍼부어놓고 “너는 ‘Bitch’라면서? 그런데 왜? 그런 것도 못 견디고 고소를 해?”라고 힐난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겁니다. 아니면, ‘센 언니’(‘Bad Bitch’의 한국적 판본이죠)란 박제된 캐릭터를 걸치고, 섹시한 'shawty'처럼 외모를 전시하고, 제2의 윤미래를 자처하며 발성과 스킬에만 몰두하고, MC로서의 정체성 없이 셀러브리티로 활동하죠. 제시, 애쉬비, 트루디가 그런 케이스입니다. 치타처럼 작사 수완을 주목할 만한 래퍼도 있지만 존재감을 잘 지속하지 못하고 있죠. 나머지는 키썸과 육지담처럼 이도 저도 아니고요.
사실, 한국 힙합에서 윤미래를 넘어서는 여성 래퍼는 이미 몇 차례 등장했습니다. 저는 00년대 후반의 리미가 여러 가지 면에서 윤미래보다 좋은 래퍼였다고 생각해요. 마찬가지 기준에서 치타와 최삼, 슬릭 같은 래퍼들이 윤미래의 그늘에 가려지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제2의 윤미래”라는 수사가 횡행하고 있는 건, 어쩌면 대중은 물론 장르 신 내부에서조차 여성 래퍼들을 공정하고 꼼꼼하게 주목하지 않았다는 뜻이겠지요. 윤미래라는 이름은, 윤미래를 뺀 나머지 모든 여성 래퍼를 비웃기 위해 신격화된 측면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언프리티 랩스타는 여성 래퍼들을 세상에 소개하는 무대가 된 프로그램입니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은 알파부터 오메가까지 선정적이었습니다. 여성 래퍼들의 노출 의상과 예쁘장한 얼굴을 전시하는 한편, 그들을 시끄럽고 질투 많고 험담을 일삼는 존재로 묘사하며 ‘암컷들의 싸움’을 연출했습니다. 여성 래퍼들은 성적 매력을 헐뜯으며 서로가 서로를 남성적 시선에 맞춰 대상화하고 상처 주는 경쟁을 벌였지요. 이런 프로그램은 몇몇 여성 래퍼들의 방송 노출을 높일 순 있겠습니다만(그런 효과 자체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이긴 합니다), 여성 래퍼들의 입지와 정체성을 더욱더 소외하고 획일화하는 것입니다.
여성 래퍼들이 힙합 신에서 자리를 마련하는 관건은 결국 이것입니다. 언어를 다뤄서 자신의 언어를 만들고 리듬을 부여하는 장르에서, 남성적 관습 바깥의 새로운 언어를 빚어내고 대안적 관습을 세우는 것이지요. 페미니스트 선언을 하고 힙합의 여성혐오를 비판하며 여성 팬들의 롤 모델로 서려고 하는 슬릭이 그런 작업을 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최종적 관건은 힙합의 남근주의를 비판하며 그 반대쪽에 자리 잡는 단계를 넘어서서, 자신의 언어를 가진 주체로서 독자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말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반문할 것입니다. “아니, 힙합이 남녀 고용 할당제를 시행하는 기업체도 아니고, 왜 굳이 여성 래퍼들의 자리를 마련해야 하나. 여자 뮤지션을 보고 싶다면 힙합 말고 다른 걸 들으면 될 거 아니요.” 이런 생각도 틀리진 않습니다. 장르 문화는 저마다 특색을 지니기 마련이고, 누아르 무비처럼 짙은 남성성이 힙합의 한 매력입니다. 뮤지션의 성비를 인위적으로 조정하는 기계적 성 평등을 수행해야 할 의무까지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힙합이란 음악을 창작하고 싶은 여성들이 있는데, 노력만큼 잘 평가받지 못하고 소외당한다면, 사람들이 편견을 갖고 음악을 듣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힙합의 남성성은 여성혐오로 비화되는 경우가 자주 있는데, 여성 팬들이 거북함을 느낀다면 좋은 일은 아니겠죠.
여성 래퍼들의 무브먼트를 지지하는 건 힙합을 편견 없이 사랑하는 태도이며, 좀 더 현명하게 힙합을 즐기는 실천입니다. 몇 년 전부터 힙합의 여성혐오에 대한 비판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장르의 영역을 존중하라며 불쾌감을 토로하는 팬이 많죠. 그런 사람들 입장에서도, 여성 래퍼들의 활동은 훌륭한 대안입니다. 힙합의 남근주의를 중화하고 견제하는 역할을 ‘말’이 아닌 ‘음악’을 통해 장르 내부에서 실행할 수 있으니까요. 한국 힙합은 그만큼 풍부하고 자유로워지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