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힙합의 장르적 로컬라이징에 관한 보론
지난주에 쓴 '혼자 화난 래퍼들'이란 글이 생각보다 많이 공유되었다. 그만큼 한국 힙합에 갈증과 염증을 느끼는 이들이 많다는 뜻인 것 같다.
저 글은 완전한 글은 아니다(세상에 완전한 글이 있겠냐만). 특정 단락의 논리와 사실관계가 틀렸다는 뜻이 아니라, 해당 주제를 오롯이 담기에는 부족한 크기의 그릇이란 뜻이다. 원고지 오십 매 분량으로 썼는데도 그렇다. '우리도 미국 힙합(혹은 흑인)처럼 하고 싶다'와 '우리는 미국처럼 할 수 없다' 사이의 긴장과 갈등은 한국 힙합의 역사를 관통해 온 뿌리 깊고 본질적인 쟁점이라, 그 비중에 걸맞게 논하려면 단행본 한 권도 넉넉지 않다고 느낀다. 이번에 쓴 글 역시 이 쟁점에 관해 다각적 프레임을 제시한다는 차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예컨대 한국과 미국 사이 콘텍스트의 간극은 과연 도하가 불가능할 만큼 까마득한가? 그렇지는 않다.
내가 집중한 건 미국 게토의 특수한 성격이었다. 그곳에선 문명화되지 않은 가난과 폭력, 차별이 벌거벗고 배회한다. 한국에도 가난과 폭력은 있다. 아니, 사실은 넘쳐난다. 산업화의 장막에 가리어진 채 비교적 가시화되지 않았을 따름이다. 만성화된 실업난과 영구화된 빈부격차, 자살하는 노인들과 매 맞고 살해당하는 여자들, 사회를 향한 절망과 증오심에 찬 청년들, 그것들에 비례해 불씨가 점화되는 차별과 혐오. 이렇게 본다면 한국 사회 전체가 유사 게토가 되어간다고 비유할 수 있다. 내가 지적한 것은 많은 래퍼가 콘텍스트의 차이점과 유사점을 살펴보지 않은 채 '그곳의 게토'에 사는 것처럼 군다는 점이다. 우원재 '시차'의 미덕은 '이 곳의 게토'를 이 곳의 언어로 표현한 섬세함이다. 그리고 우원재에 앞서 이런 작업을 해 온 래퍼들도 분명 있다. 나의 취지는 대중에게 노출된 상업적 자리에서 반향을 일으킨 이 신예 래퍼의 장점을 통해 한국 힙합 신에 부족한 것을 환기해보자는 것이었다.
많은 래퍼들이 요령 없이 창작을 답습하지만, 힙합이 주류 음악으로 떠오른 배경에도 한국사회의 게토화란 콘텍스트가 작용하고 있다. 그건 힙합의 매력이 젊음을 사로잡았다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저항정신이란 관습을 걷어내고 혹은 그것을 뒤집어보면 힙합은 굉장히 보수적인 음악인데, 물욕과 자수성가를 예찬하는 음악이 진보적이라면 오히려 이상한 얘기다. 나는 한국 힙합의 사회적 부흥 아래 이런 장르적 성격이 이데올로기로 꿈틀 거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스웨거, 허슬 같은 요소가 지나치게 장르를 대표하며 소비되는 것도 같은 내막 일지 모른다. 어쩌면 돈이 지상의 유일신이고, 그에 버금가는 윤리와 가치는 없으며, 내 성공은 오직 내 허슬 덕이요 니 실패는 니 게으름 탓이고, 공동체적 사고는 선비질이 된 시대에 힙합이 도착한 것뿐은 아닐까?
언젠가 이 곳에 쓴 글 한 편을 첨부한다. 이 글을 보론으로 읽으면 앞선 글은 덜 불완전해질 것이다. 제목은 '게토화한 한국 사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