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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Oct 02. 2017

'노오력'의 음악

보수적인 음악과 극우화하는 사회

힙합은 ‘나’를 주어로 하는 음악이며, 뱃속의 묵은 말을 토해낼 계기를 주는 음악이다. 그래서 나도 힙합을 좋아한다. 이 점이 집단주의 전통이 있는 한국 사회에 좋은 변화를 가져 올 수 있다고 믿는다. 이곳은 ‘난 체’하는 인간을 따돌리고, ‘우리’와 다른 모난 돌을 쪼아내고 마는 사회다. 젊은 사람들조차 ‘자의식’이란 말을 욕설로 쓴다. 사람들은 타인이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관대해질 이유가 있고, 타인들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용기를 품어도 좋을 것이다. 얼마 전 ‘혼자 화난 래퍼들’이란 글을 쓰며 한국 래퍼들의 허세를 폭로했지만, 거기에도 앞면과 뒷면이 붙어있다고 인정한다. 사실, 많은 한국 래퍼는 자의식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클리셰를 재현하고 있다.


다만 현재 한국 힙합이 사회와 긍정적 관계를 맺고 있는지는 말하기 어렵다. 앞서 말한 순기능은 일상의 관계에서부터 효력을 낼 것이다. 한국은 공동체가 토막 나고 관계의 토대가 망가져 가는 사회다. 개인들은 원자화되고 공동체로부터 해리되고 있는데, 힙합이 사회적으로 흥행한 것도 개인적 삶의 양식이 강해지는 세태를 반영하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의미심장한 건 이런 추세와 함께 온라인 소통경향이 심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오프라인 관계의 해리와 온라인의 유사 현실화를 아울렀을 때 한국이 과연 속에 있는 말을 하기 힘든 사회인가? 답할 필요도 없다. 지금은 혐오와 위악 같은 마음 밑바닥의 단말마가 겉잡을 수없이 출몰하는 상태다. 온라인에선 호남 혐오, 여성 혐오, 장애인 혐오가 범람한다. 얼굴과 실명을 까고 로그인하는 페이스북에서도 얼마나 추한 말들이 활개치고 있는가. 오프라인에서조차 노키즈존 같은 ‘솔직한’ 발상이 현실화 되었고 여성을 노리는 증오범죄가 암약하고 있다. 묘하게도, 힙합의 한 콘텐츠도 혐오와 위악이다.


블랙넛 같은 캐릭터가 양지로 나오게 된 배경이 무엇인지 궁금해진다는 말이다. 유튜브와 힙합 LE, DC 힙갤, 일베 등을 정탐하면 한국 힙합 팬들 가운데 일베 출신 혹은 일베 성향의 유저가 꽤 있다는 정황증거가 발견된다. 힙합을 주제로 댓글이 오가다 밑도 끝도 없이 부모 욕이 나오고, 일베에서 쓰는 온라인 방언이 흔하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말은 ‘씹선비’라며 모욕당한다. 아닌 게 아니라 현재 한국 힙합의 콘텐츠는 일베의 사상과 궁합이 좋다. 돈(힘)을 향한 숭배, 약자에 대한 능멸, 허슬(노오력) 이데올로기, 자수성가 신화와 그 거울상 같은 무임승차 혐오, 진지한 것을 향한 적개심(‘씹선비’). 이렇게 딱딱 하나씩 매칭이 되는 수준이다. 꼭 일베란 고유명사로 말할 이유도 없는 게, 이건 널리 사회화된 일베적인 것들이다.


이것이 놀랍거나 기이한 일이 아닌 건 힙합이 굉장히 보수적인 음악이기 때문이다. 물욕과 각개약진의 자수성가를 예찬하는 음악이 어떻게 진보적이겠는가. 다만 미국 힙합에서는 게토를 공유하는 약자들의 형제애가 이걸 중화해주는 것이다. 미국 흑인 래퍼들은 형제들의 현실을 대표하는 정치적 랩을 발표하고, 랩스타가 된 후에도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는다. 때문에 인종 탄압에 대항하는 Black Lives Matter 운동에 래퍼들이 동참했고, “나는 성공한 흑인이다. 중요한 건 내 인생이다.”라고 BLM을 외면한 릴 웨인이 그의 절친 티아이에게 비난당했다. 한국에서는 공동체적 연대의식을 나눌 ‘우리’라는 정체성이 흩어져 간다.


힙합이 젊음을 사로잡은 이유는 힙합이 지닌 Good Vibes Only의 태도 같은 게 아닐 수도 있다. 아니, 그런 자기계발의 표어야 말로 문제의 원인일지 모른다.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향하는 노력이 꼭 나쁜 건 아니다. 하지만 한국은 자수성가가 거의 불가능해진 사회고 그런 적체가 극우적 이데올로기로 비화되고 있다. 스스로 ‘노오력’하는 대신 사회를 향해 떼를 쓰는 약자들을 혐오하는 일베 유저가 일리네어의 Came From The Bottom에 감복하고 있다면 어찌할 텐가? 사회가 힙합을 소비하는 플랫폼 <쇼미더머니>가 팔아 온 힙합의 얼굴은 디스와 스웨거 같은 요소의 과대-선정적 포장이다. 그렇다면 어떤 대중이 힙합에 염증을 느끼는 이유와 다른 대중이 힙합에 열광하는 이유는 동일할지 모른다. 힘과 위악의 논리다.


중고등학교에 일베 문화가 급속히 침투한 시기에 왜 힙합도 급속히 퍼졌는가. 두 질문의 답은 같지 않겠지만 교차점이 있을 것 같다. 저스트뮤직은 스윙스가 운영하고 블랙넛이 소속돼있는 레이블인데, 여러모로 일베적 색채가 짙은 이 레이블의 팬 중에는 실제로 중고등학생이 많다. 힙합에 관해 어두운 부모들이 당신의 자녀가 힙합에 열광하는 이유는 그것이 품은 긍정의 기운이라고 전해 듣는다면 위험한 일이다. 힙합은 실로 모순되면서 풍부한 모습의 음악인데, 그것들 중 공동체적 성격은 말하지 않은 채 돈과 자수성가 같은 코드로 장르의 본질을 설명하는 게 해로운 이유는 이 점에도 있다. 힙합은 어떻게 젊음을 사로잡았는가, 라는 진술은 “젊음은 어떻게 힙합에 사로 잡혔는가.”로 고쳐 써야 할지 모른다. 한국 힙합과 한국 사회가 주고받는 영향은 훨씬 엄밀한 문화 비평의 주제가 되어야 한다. 차후 이 주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글을 공론장에 발행할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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