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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Oct 25. 2017

장르의 안과 밖

송민호 '노땡큐' 가사 논란


재작년 <쇼미더머니5>에서 “산부인과처럼 다 벌려”라는 랩을 해 사과문을 쓴 송민호가 에픽하이 신보에 참여하며 사진으로 첨부한 가사를 썼다.


송민호가 참여한 ‘노땡큐’는 유명인에 대한 대중의 참견에 반격하는 노래다. 그가 쓴 “Motherfucker만 써도 이젠 혐이라 하는 시대, shit.” “느그들이 누굴 평가하고 하면 띠꺼워.”는 과거에 한 사과를 뒤집는 가사다. 산부인과 협회까지 비판에 가세하자 허겁지겁 고개를 조아리더니, 그 모든 위기가 지나간 일이 되자 뻔뻔한 척, 당당한 척 한다. 당당한 게 아니라 비겁한 태도다. ‘Motherfucker’ 정도의 표현이 여성혐오라고 비난 받은 적은 없다. 있다고 해도 아주 드문 예외 사례일 것이다. “산부인과처럼 다 벌려”로 물의를 빚었으면서 왜 그 말을 은근슬쩍 ‘Motherfucker’로 바꾸는가? 허수아비 때리기를 넘은 이미지 세탁이다. “저렇게 사소한 건수로 대중에게 물어 뜯긴 나”라고 과거를 다시 쓰며 피해자 코스프레하는 것이다. 이건 자신이 뱉었던 말의 심각성을 실은 자신도 알고 있다는 실토다.


힙합 뮤지션들은 인터뷰에서 피쳐링이나 컴필레이션 작업을 하며 참여 래퍼의 가사를 수정하거나 반려할 때가 있다고 말한다. 상향식 컨펌과 프로듀싱을 거쳐 더 많은 사람 앞에 음악을 내놓는 YG 같은 대형 기획사라면 말할 나위 없다. YG는 산부인과 사건에서 사과의 한 주체였다(송민호가 쓴 사과문도 회사가 대필해준 것일지 모른다). YG는 에픽하이의 소속사이기도 한데, 사건에 대한 사과를 물리는 가사가 실린 앨범을 그대로 출시했단 건 그를 통해 YG의 입장 역시 가늠 해봐도 된다는 뜻이다. 'Hater'를 비꼬는 주제의 트랙에 송민호를 참여시킨 타블로도 부적절한 섭외를 했다.


송민호는 "Rhyme의 R도 모르는 대중은 프로듀서가 됐"다고 빈정댄다. 대중 가요하는 아이돌이 저런 말을 하면 어쩌자는 건가 싶다. 정 그렇게 억울하면 힙합 매니아(?)들과 어울리며 언더 래퍼 하든가. 그건 또 싫을 거 아닌가? 게다가 산부인과 운운이 뭘 안다고 해서 평가가 달라질 만큼 깊이 있는 가사인가? 그 자신이 사과하면서 밝혔듯 “래퍼들과 경연 프로그램”에 참가한 와중 “더 자극적인 단어 선택과 가사를 써야 한다는 부담감”이 낳은 선정적 표현 아닌가? 그 가사는 라임의 R자를 아는 전문가들도 비판 했었다. 뉴스 검색하면 기사가 많이 나온다. 그렇다고 평론가들 얘기에는 귀 기울이는 것도 아니잖은가. 그냥 욕먹을 소리 엎질러 놓고 참견은 듣기 싫다는 걸로 밖에 안 들린다.


라임을 아는 매니아를 대상으로 창작하면 그걸 모르는 대중을 상대할 때 보다 좋은 음악이 나올까? 송민호가 그런 의도로 가사를 쓰진 않았겠지만, 기왕 대중을 무시하는 말을 했으니 한 번 따져보자. 장르 팬은 장르의 관습과 클리셰를 즐기는 사람들이고 그만큼 그것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때문에 섣부른 대중화가 장르의 정체성을 희석할 가능성이 있지만, 반대로 장르 팬들은 클리셰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 오히려 클리셰에 대한 대중의 이의를 접수할 때, 클리셰의 가치와 존재 이유를 성찰할 계기가 생기기도 한다.


힙합 팬들은 래퍼 씨잼의 ‘신기루’가 힙합 신의 부패를 꼬집은 명곡이라고 격찬한다. 미안하지만, 신기루는 그런 의미에선 무능하고 납작한 트랙이다. 씨잼은 동료 래퍼들에게 어떻게 실망했단 건지 설명하는 대신 장르의 혐오표현 클리셰를 늘어놓는다. "게이 래퍼끼리 시기를" "조금만 있으면 내 오줌보는 곧 터져. 힙합 신 일층부터 옥상까지 존나 뛰어도 내가 갈 화장실은 없지. 여긴 국힙 여고.“ ”투팍이 부활을 해서 내한 했으면 제시 빼고 전부다 싸대기를 댔을 걸(남자 래퍼 모두가 여자 래퍼 제시만큼도 남자답지 못하다는 뜻)“처럼 장르 내에서 관습화한 '자격 없는 타자'의 이미지에 비판 대상을 빗대는 것이다. 이렇게 어떤 대상을 그와 동 떨어진 표상을 통해 비난할 때 그가 쏘는 화살은 과녁에 명중하지 못한다. 씨잼은 래퍼들의 작태를 조목조목 논파하는 대신, 그들이 게이 같고 여자 같다고 장황하게 비유하는 데 말솜씨를 올인했다. 여기서 크리티컬 데미지를 입는 건 씨잼이 호명한 래퍼들이 아니라 밑도 끝도 없이 불려 나온 게이들과 여자들의 정체성이다. 래퍼들은 ‘나쁘고 열등하다’고 돌이킬 수 없이 규정당한 존재들과 그저 비교 되었을 따름이다.


‘신기루’는 뜬구름 같은 냉소와 단편적 사실 나열로 점철돼있다. 노래를 들어봐도 씨잼이 왜 래퍼들에게 환멸을 느끼는 건지 손에 잡히지가 않는다. 반대로 그가 혐오표현 클리셰를 버린 채 가사를 썼다면 하나하나 정황과 주장을 서술할 필요성을 느꼈을지 모른다. 이처럼 이미 성립돼있는 표현에 의존하는 건 창작의 타성이다. 비겁한 수를 써도 'Bitch'고, 음악을 하는 대신 완력을 써도 'Bitch'고, 인맥 놀음을 해도 'Bitch'고, 실력 보다 인기에 목을 매도 'Bitch'라면 그 비판들에 무슨 내용이 있는가? 너희는 남자답지 못하다고 ‘일침’을 늘어놓는데, 그래서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그게 뭐가 문제라는 건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을 것이다.


산부인과 어쩌고를 향한 비난은, 이런 물음과 비로소 마주하도록 래퍼들을 돌려 세우는 계기였다. 장르 바깥에서 장르를 향해 제기되는 비판에는, 그것이 비록 윤리적 비판이더라도 '예술적' 의제로 이어질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어떤 뮤지션과 장르 팬들은 힙합의 혐오 가사가 도마에 오를 때 마다, "예술을 윤리로 심판하지 말라"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라고 귓구멍을 막는 시늉을 한다. 그런 대응이 힙합이 예술로서 성장할 기회를 빼앗고 장르를 한계에 가두는 것을 깨닫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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