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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C 워너비 Nov 01. 2017

공감이 주는 영감

공동체의 소실과 '공감 가는 가사'

한국 힙합에 관한 글 몇 편을 쓰면서 '공감 가는 가사'를 지지하는 것 같은 논조를 취하게 됐는데, 그 글들에서 강조한 가사의 미덕은 공감이라기보다 설득력이었다. 사실 나는 공감이란 가치를 낭만적으로 보진 않는다. 가령 공감 가는 가사가 그렇지 않은 가사보다 우월하진 않다는 지적을 할 수도 있다. 나는 그런 입장에 수긍한다. 요 몇 년 동안 사회적 열쇳말이 된 '공감 능력'은 가끔 냉담하게 입 꼬리를 올리고 걸러서 듣는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그것이 다른 무엇에도 앞서는 절대적 인간성처럼 회자되곤 하기 때문이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공감이란 감정상태를 한 꺼풀 벗겨보면 그 속살의 육질은 안도감이 아닐까. 공감은 나와 그의 동질함으로 성립하고, 동질함을 확인하며 창출되는 감정이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위로를 얻는다면 그 실체는 그가 나보다 특별한 인간이 아니라는 초조함과 불안감의 해소 일지 모른다. 마찬가지로 타인의 고통을 보며 공감한다면 그와 엇비슷한 삶의 조건 속에 살지만 그만큼의 불행엔 빠지지 않은 나의 행운이 그것을 베푸는 것일지 모른다. 재앙의 구렁텅이에 빠진 사람에겐 타인의 불행이 시야에 들어 올 여력도 없다. 사람들이 공감능력이라 부르는 건 주로 타인에 대한 연민인데, 그건 누군가를 내려다보는 부감의 앵글을 통해 연출되는 감정일지 모른다.


하지만 알고 있을 것이다. 다른 이들보다 덜 불행한 사람이 꼭 공감을 베풀지는 않는다는 것을. 오히려 그건 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그런 문제를 겪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알고 싶지 않다고 외면하는 사람도 많다. 공감이란 상태에 이르려면 눈에 보이지 않는 동질성을 상상해내는 적극성과 이타성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리고 이런 이타성을 단순히 시혜심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이 능력이 바로 공감능력일 것이다. 공감능력은 누구나 가게 마땅한 인간성의 커트라인이 아니라 어떤 수준의 지적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공감능력 있는 사람들이 우월하다는 게 아니라 그것을 갖추지 못했다고 별날 것은 없다는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공감이란 것이 생각보다 희소한 자원이란 걸 알 수 있다. 나의 개별성으로부터 그의 개별성으로 건너가는 일은 사건이다. 그것이 일상이 아니라 사건이기 때문에 평상심을 넘어선 감정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다. 타인의 삶에 무관심한 사람은 그의 삶에서 무엇이 나와 같고 다른지 발견할 수 없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공감능력의 부재에 처했다면 그건 저마다가 자신의 곤경에 빠진 채 타인을 향한 관심을 잃었다는 뜻일 수 있다.


앞서 공감의 실체가 안도감 일지 모른다고 말했지만, 설령 안도감이라 한들 어떤가. 사람들은 불안과 피로감을 헤치며 살아간다. 세상이 요구하는 기준은 낮지 않고, 내가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게 아닐까라는 자기부정에서 자유로울 만큼 빼어난 사람은 드물다. 나의 삶만 버거운 것이 아니라는, 실은 나도 너만큼 잘 해내고 있다는 안도감은 작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긍정하도록 허락해준다. 그런 위안은 삶에서 낙오되지 않고 한 발 더 내딛을 수 있는 정신적 에너지를 급유한다. 아니, 공감은 개인적 차원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나도 이 기준이 버겁고 너도 버거우며 그 역시 마찬가지라면, 문제는 그 기준에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우리가 우리를 부정하도록 학대하는 기준을 바꿔야 하는 것이 아닐까. 양질의 공감은 나의 문제를 '우리'의 문제로 재인식하고 그것에 시선을 맞히도록 이끄는 공동체의 기반이 될 수 있다. 이 모든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의 공감은 곧 발전과 성장을 돕는 '영감'이다. 이 아득한 세상에서 혼자가 아니며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이치를 깨닫게 하는 게 '공감 가는 가사‘라면 그것을 폄하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공감 가는 가사에 우월적 가치를 두지 않는다”는 처음의 말을 뒤집는 것 같다. 아무래도 좋다. 그만큼 한국 사회와 한국 힙합은 한 쪽 축을 잃고 기울어져 있다. 그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라면 공감의 가치는 강조될 만 하다. 내 개인의 삶을 과시하는 데 파묻히지 않고, 세상과 타인에게 관심을 둔 채 공통의 표정을 읽어내는 영민한 창작자만이 그런 가사를 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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