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네어 레코즈 '11:11'
일리네어 레코즈가 2014년에 발표한 컴필레이션 앨범 ‘11:11’은 제 자리를 찾아가지 못한 앨범이다. 이 말은 과소평가당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범람하는 찬사 속에 말해져야 할 부분이 제대로 말해지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간 일리네어 레코즈를 향한 평판은 두 부류였다. 한국 힙합의 패러다임을 바꾼 ‘게임 체인저’로 헌액 되었고, 한국 힙합을 획일화한 장본인으로 빈축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11:11’은 장르 신의 변화와 단절이 아닌 ‘연결고리’로 가늠되어야 한다.
먼저 2014년으로 시간을 되감아 보자. 그해는 과도기였다. 일리네어는 그 이삼 년 전부터 스웨거 힙합과 미국 메인스트림 힙합 사운드로 내기를 걸었다. 90년대 말, 한국 힙합의 태동과 함께 전승된 붐뱁 사운드와 진정성 서사는 대체되어 갔다.
‘11:11’의 타이틀곡은 일리네어 공전의 히트곡 ‘연결고리’다. 그간 이 앨범에 관해 몇 편의 리뷰가 발행되었지만, 이상하게도 왜 저 트랙의 이름이 연결고리인지, 왜 MC 메타가 참여했는지 거론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별 내용 없는 가사와 맞물리지 않는 밑도 끝도 없는 네이밍에다, 트랩 사운드로 미장한 트랙의 훅을 그와 대척점에 있는 래퍼가 불렀는 데도 말이다.
이 각도에서 질문해본다면, ‘11:11’의 핵심은 트랙 리스트의 무게 중심에 자리 잡은 ‘A Better Tomorrow’다. 이 트랙은 여러모로 앨범 내에서 이질적이다. 우선 트렌디한 사운드의 나열 속에 동 떨어진 클래식한 붐뱁 비트다. 가사의 서사성 대신 가사의 양식화를 추구한 앨범에서 가장 가사의 비중이 크고, 메시지를 발표하는 논설문의 성격이 강하다. 다섯 명의 래퍼가 훅도 없이 10마디, 24마디, 32마디, 40마디씩 장문의 벌스를 뱉는다. 그만큼 할 말을 많이 한 트랙이란 뜻이다. 마지막으로 한국 힙합의 파이오니어이자 ‘1세대 래퍼’의 대명사, MC 메타와 션이슬로우가 참여했다.
‘A Better Tomorrow’는 “신과 구"를 잇기 위해 제작된 "연결고리"다. 가사, 사운드, 플레이어를 아우르는 프로덕션의 모든 방면에서, 2010년대 들어 격변해 그 이전과 이후로 양분되는 장르 신의 단절적 경향을 이어주는 역할을 맡았다. ‘더 나은 내일’을 갈구하는 주제의식이 스웨거 힙합의 문법, 자기계발과 자수성가로 동어 반복되는 가운데, MC 메타와 션이슬로우는 그 주제의식을 자기 시대의 문법으로 변주해 축사를 얹어준다. 같은 의미에서, 이 트랙에서만큼은 앨범 내에서 독보적 랩 스펙을 과시한 빈지노가 아니라, 가장 소박한 랩 스킬에 머무른 더 콰이엇이 주인공이다.
콰이엇은 일리네어 창립 이후 전환한 작사 경향을 버리고, 소울 컴퍼니 시절을 방불케 하는 진중한 톤의 가사를 뱉는다. 어느덧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우린 한국 힙합의 자존심, 라면으로 치면 농심” 같은 허당스러운 표현도 이 곡엔 없다. 그는 자신이 쫓아온 건 돈이 아니라 꿈이었으며, 돈은 꿈 뒤에 따라온 선물일 뿐이었다고 명료한 설명을 전한다. 이는 그동안 뱉어왔던 ‘돈 자랑 가사’에 나름의 내면을 부여하는 작업이며, 스웨거 힙합의 관습을 앞선 시대의 관습 진정성의 계보에 삽입하는 시도다. 콰이엇은 야망 없이 출세만 노리는 래퍼들을 조소하고, MC 메타는 영혼 없이 출세를 꿈꾸는 래퍼들을 향해 일갈한다. 정확히 반대방향에서 주제의식에 접근해오는 “신과 구의 연결고리” 속에 두 시대의 관습은 접점을 찾고 융화된다.
이런 해석의 가늠쇠를 겨눌 때 알 수 있다. ‘연결고리’는 MC 메타가 즐겨 뱉는 단어, 연결고리의 오마주이며 힙합 신의 연결고리를 자임하는 선언이다. 아마도 이상의 프로덕션을 주도한 건 콰이엇이었을 것이다. 그는 도끼와 함께 면도와 슈퍼비, 도넛맨과 오왼 오바도즈 같은 후배 래퍼들에게 관심을 갖고 후원해왔다. 한편 MC 메타와 타이거 JK 같은 시니어 래퍼에게 존경심과 특별한 감정을 밝혀왔다. 앨범의 포문을 여는 트랙은 'We Here 2'다. 콰이엇은 자신에게 귀감이 되고 도움을 준 래퍼들의 이름을 Shout Out 한다.
난 점점 나의 영웅들을 닮아가 (...) / Tiger JK 아님 MC메타 그들이 날 여기에 있게 한 선배이기에 / can't forget Double D yea Double T / 날 track에 처음 껴준 형들은 그들이었어
이는 앞선 세대의 언더 신에 소속된 채 시니어 래퍼들과 교류했던 그들의 정체성을 반영한다.
돈을 번 래퍼는 많고 으스대는 래퍼도 많다. 하지만 도끼와 콰이엇은 장르 신의 전통에 대한 소속감이 없는 스윙스, 새로운 관습과 거리를 두는 이센스, 음악적 좌표가 없는 사이먼 도미닉, 아이돌에서 힙합 신으로 이적한 박재범 등 동년배 플레이어들과 다르다. 새로운 관습의 선구자인 동시에 장르 신에 대한 역사관을 품은 중간자다. 어느덧 거의 모든 래퍼가 자기 과시를 재현하는 시대에, 이 점이야말로 그들을 다른 래퍼들과 구분 지어주는 가장 뚜렷한 정체성이다. 콰이엇을 랩 게임을 바꾼 사람이라고만 이해한다면, 그에게서 엿보이는 장르 신의 계보에 대한 적자 의식을 헤아릴 수 없다.
‘연결고리’라는 트랙을 새로운 관습의 출범을 알리는 ‘거대한 선언문’이라고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장르 신의 어제와 오늘을 묶어주는 ‘음악적 편철’ 임을 재발견해야 한다. ‘11:11’에 특별함이 있다면, 바로 이런 장르사적 의의다. 최신 랩 스타일을 따라 하는 것이 곧 실력의 잣대로 통하고, 과거의 족적은 퇴물이라고 비웃음을 사는 시대다. 저 의의는 강조되고 재조명되어야 한다.
리스너들은 ‘11:11’의 랩 스킬과 사운드를 논하며 갑론을박을 벌이고, ‘A Better Tomorrow’에서 빈지노의 플로우에 홀렸다가 MC 메타가 나오자마자 음악을 껐다고 이죽거린다. 이것은 창작물을 하나의 독자적 세계로 바라보고, 그 세계의 존재양태와 또 다른 세계들과의 관계를 곱씹어보는 예술적 태도의 결핍에 지나지 않는다. ‘11:11’에 던질만한 반문이 있다면, 앞서 말한 장르사적 의의가 짜임새 있는 음악으로 구성되었느냐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