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 래퍼 3>에도 학교를 자퇴한 참가자가 많은 것 같다. 이런 사례는 매 시즌 있었다. 고등학교 선생이 아니라 잘 모르겠지만, 제도 교육 현장의 국지적 트렌드가 아닌가 하는 짐작도 든다. 래퍼 데뷔 가능성이 넓게 펼쳐졌기 때문은 아니다. 고등학교 졸업장과 그에 연계되는 대학 졸업장이 헐값이 되고 반대로 기회비용은 커졌기 때문이다. 취업 시장에서 대학 프리미엄이 갈수록 줄어드니 다른 진로를 일찌감치 모색하는 게 이득이면 이득이지 손해는 아닐 수 있다. 이제는 예전만큼 ‘중졸’이 사회화가 단절된 인생이라 간주되는 낙인은 아니다. 이런 셈법은 더는 낯설지 않고 두 갈래로 나타났다. 대학 입학시험 대신 공무원 시험을 쳐서 안정성을 확보하든가, 불안정한 대신 판돈을 크게 배팅하는 '고등 래퍼'가 된다.
자퇴한 학생들은 시간표의 감옥 같은 교실을 "I Don't Give a Fuck" 때려치우고 “힙합은 자유니까” 또래들과 크루를 만들어 '허슬' 한다. 자신들 만의 작은 게토를 소환해 ‘힙합을 산다’는 환상과 해방감에 젖을 것 같다. 유튜브로 힙합을 배운다는 말이 철없어 보이지만, 그렇게만 퉁을 줄 수 없는 건 앞서 말한 공교육의 가치 절하 때문이다. '자퇴 힙합'은 어떻게 공교육의 기회비용이 되었을까. 어린 래퍼들에게 이름을 알릴 기회를 주고, 상업 레이블 드래프트를 제공하는 미디어 프로그램이 제도화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런 전철을 밟아 성공한 ‘선배 래퍼’들이 시즌 1,2 마다 있었다. 힙합 오디션 방송은 비유적 의미가 아니라, 말 그대로 제도 교육을 대신해 계층 이동과 재생산을 제공하는 입시장이 된 셈이다. 이를테면 또 다른 계열의 예체능 입시가 시청자들 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특정한 소질을 가진 극소수에게 국한되는 사례라서 일반화할 수는 없다. 사실 녹음 장비와 편곡 장비를 사는 데도 돈이 든다. 자유당 국회의원 장제원의 아들 노엘처럼 표준적 삶의 대안이 있지만 '다른 방식의 삶'을 꿈꾸며 일탈을 감행하는 경우도 있겠다. 이런 경우는 사회적 성공 가능성이 절단 나 가난에서 탈출하려 어린 나이에 랩 게임에 뛰어드는 미국 흑인들과는 상황이 다르다. 다만 그 경우에도 래퍼로서의 성공이 공교육을 갈음하는 직업이요 명예가 된 현실이 부모들을 설득하는 명분이 될 것 같다. 어느 정도 낭만적 일탈도 있을 테고, 그래서 저런 사례들을 낭만화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