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정신일까, 파티 음악일까
소위 저항 정신은 빈번히 오해받는 힙합의 개념이다. 두 가지 오해가 있다.
하나는 힙합은 차별받는 흑인들의 저항에서 시작했으며 그것이 힙합이 품은 정신이라는 통념이다. 이건 장르 밖의 대중과 필자들이 가진 오해다.
나머지 하나는 힙합의 시작은 파티 음악이고 저항정신은 힙합의 일부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이건 장르 뮤지션과 팬들이 지닌 오해다.
힙합이 파티장에서 브레이크 구간을 반복해서 트는 턴테이블 스킬에서 비롯한 건 사실이다. 잘못된 통념이 널리 퍼져 심지어 그것을 잣대로 힙합이 재단당하는 상황에서 올바른 사실을 알려주는 건 꼭 필요한 작업이었다. 장르 내부에서 저 사실을 반대 방향으로 일반화하는 치우침이 생긴 게 문제다. 저 '팩트'를 단편화해 앵무새처럼 읊으며 힙합에서 윤리와 깊이를 추구하는 시도를 입 막음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힙합의 시작은 파티 음악이라고요! 놀고 즐기는 게 우선이란 말이에요! 사회 비판을 강요하지 마세요, 힙알못들아!"
사회의식 등을 표현하는 컨셔스 랩은 힙합의 하위 양식 중 하나고, 래퍼들이 어떤 가사를 쓰라고 강요받을 이유는 없다. 하지만 정확하게 정리하면 힙합이란 '장르 음악'의 출발은 파티 음악이지만 힙합이란 '문화'의 바탕은 '저항 정신', 그러니까 미국 흑인들의 사회적 현실과 떼놓을 수 없다. 무엇의 시작이 어떻다는 것과 무엇의 성격, 본질은 범주가 다른 문제다.
힙합의 역사를 소개하는 책자로는 제프 창의 'can't stop won't stop'이 저명한데, 그 두꺼운 책의 모든 챕터가 죄 '저항 정신'에 관한 서술이다. 저자는 힙합의 발상지 사우스 브롱크스의 상황을 묘사하는 걸로 시작해 당대 흑인들의 현실 속에 힙합이 어떻게 전개됐는지 추적한다.
내가 '저항정신'이란 개념을 꺼리는 건 다른 이유에서다. 장르를 규범화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장르 문화를 이해하는 프리즘이나 콘텍스트가 아니라 명령과 타자화로 빠질 개연성이 있다. "힙합은 저항의 음악이거늘 너희는 타락하였구나!" "소울은 아픔의 음악입니다(숙연)." 이런 거.
'저항 정신'이란 규범이 된 개념을 젖혀두면 힙합 문화의 바탕에 특수한 사회적 현실이 얼마나 넓게 깔려있는지 알 수 있다. '저항 정신'은 힙합의 '일부'가 아니라 힙합의 '밑바탕'이다. 다만 장르의 모든 요소를 그것으로 환원해선 안 되고 그 요소들의 독자성을 존중해야 한다.
언젠가 한국 힙합의 여성혐오를 비판하는 글을 썼더니, 누가 힙합 le 게시판에 글을 퍼가서 길게 반론을 하더라. 미국 주류 사회가 보기에 힙합이 폭력적 음악이었다고 쓴 구절에 "힙합의 시작은 파티 음악입니다! 제발 공부 좀 하세욧!"이러고 있다. 아는 문자가 그거밖에 없으니 오만 데 다 갖다 붙인다고 할 밖에.
한국에서 힙합은 더 이상 마이너 문화가 아니다. 한국에서 가장 큰 음악 방송이 일곱 시즌이나 힙합 오디션 프로를 메인 상품으로 밀고 있는데 무슨 마이너인가. 그럼에도 장르 팬들 사이에 마이너 문화를 향유한다는 배타적 자부심은 두터운 묘한 상황이다. 문제는 이 사람들이 "나는 쇼미충과 달리 이 문화의 진짜 멋을 아는 리스너야!"라는 자부심이 드높은 나머지 귀가 닫혀있다. 자기네 입맛에 맞는 지식만 취사 공유하고 쓴 맛이 나는 관점에는 상대를 힙알못이라 욕하며 적반하장으로 대든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사람들 대부분이 인터넷 대중의 반지성주의를 공유하고 있어 힙합을 공부한다는 발상에 알레르기를 일으킨다. 장르 바깥이나 안 편이나, 이래저래 논의는 어긋난 채 공회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