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인간성을 대단하게 평가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이 나보다는 인품이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나보다도 못한 인간이 많다는 것 역시 목격해왔다. 말로는 번듯한 자아를 꾸며내지만, 자기가 어떤 인간인지는 자기가 제일 잘 알 것이다. 나라고 다르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런 모순됨 자체가 인간성의 본질일지 모른다. 나 자신이 상황에 따라 이타심도 베풀고 야비해지기도 하는, 그러면서 야비함을 정당화하는 ‘보통 사람’이란 걸 인정한다면 타인을 이해하는 데도 폭과 깊이가 생긴다.
야비함을 정당화할 생각도 하지 않는 위악의 시대가 된 것처럼 보이지만, 다 나름의 개구멍을 찾아서 짖어댄다. 차별의식을 능력주의로 정당화하고, 사회적 평판을 피드백받지 않는 인터넷에서 배설하고, 자기보다 약해서 후환이 없는 사람들한테 본색을 드러낸다. ‘그래도 되는 상황’이 오면 서슴없이 '보통'의 범주를 벗어나 추물이 되는 보통 사람들.
도덕성은 작위가 아닌 부작위에 기반을 둔다. 나쁜 행동을 하지 않는 자제심이 기본이기에 보상 체계가 약하고 재미도 없다. 부도덕은 반대다. 반칙을 쓰면 더 많이 얻을 수 있고, 금지된 욕망은 쾌락을 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선량해질 수 있는 상황에서도 충분히 선하지 않지만 악행에는 방아쇠가 달려있다. 선인은 적고 악인은 많다. 오늘날 선행이 아이스 버킷 챌린지 같은 과시적 시혜 행위와 PC 운동 같은 부도덕한 타인을 향한 징벌을 통해 실천되는 건 그런 이유다. 보상체계가 약한 도덕 행위에 도덕성을 벗어난 보상체계를 덮어씌워 실천을 고무하는 것이다. 인간은 선행을 할 때조차 선하지 않다. 그런데, 그 선하지 않은 선행이 누군가의 급한 불을 꺼주거나 악을 징벌하는 효과를 낸다. 인간은 가증스럽고 표리 부동하다.
언젠가 <하얀 거탑>에 관한 글을 쓴 건 드라마가 재미있기도 했지만 내 가치관을 머릿속에서 꺼내어 볼 계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 글에서 말했듯이, 현실에는 탁월한 악인도 고결한 선인도 드물다. 현실에 편승하고 얽매이는 소인배가 널렸을 따름이다. 선하기도 악하기도 한 사람들을 위해 악행에 따른 처벌 체계와 선행을 자기 완결적으로 이끌어주는 보상체계를 세우는 것이 공동체의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어떤 식으로든 사람에게 기대를 걸면 실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