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를 향한 도덕적 환상이 위험한 건 약자를 대상화하며 주체성을 무시하는 것뿐 아니라 인간과 권력에 대한 이해를 왜곡하기 때문이다.
약함과 선함은 동의어가 아니다. 만약 약자가 강자보다 악한 일을 덜 한다면, 남을 괴롭힐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약자일수록 작은 악행을 저지르기 쉽다. 불리한 삶의 조건을 버텨내는 과정에서, 강자보다 권력에 예민해지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거꾸로 활용할 전략을 궁리하게 된다. 그건 강자에게 빌붙는 전략일 수도 있지만, 대개 자신보다 약한 인간을 뜯어먹는 전략이다. 먹이 사슬이란 게 그렇다. 쥐가 고양이에게서 도망치고 참새를 잡아먹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경치. 열악한 환경의 진보 사회단체에서, 그들이 성토하는 '갑질'과 노동착취가 종종 벌어지는 것도 그런 이유다. 이성의 눈으로 본다면 위선이지만, 힘의 논리는 세상의 섭리라 부를 것이다.
누군가는 약자들이 폭력을 저지른들 강자들의 폭력보다 크지 않다고 반론할 수 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 역시 도덕주의에 빠진 논리다. 강자의 폭력을 비판하는 게 시급하다는 판단으로 약자의 폭력에 도덕적 면책권을 지급하는 논리에 빠질 수 있다. 약자들의 폭력이 작은 폭력이라는 사실은 그것에 학대당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지우지 못한다. 그 합이 크건 작건, 폭력에 당하는 개개인으로선 세상 무엇보다 큰 폭력으로 체감될 수 있다. 저런 옹호는 약자들이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하고 윤리적 자책에 무뎌지도록 한다. 어떤 차별도 저지르지 않고 세상 모든 차별을 한 몸으로 감당하는 '궁극의 약자'가 있다는 사상은 위험하다 못해 불길하다. 그 생각을 뒤집으면 내가 저지르는 어떤 폭력도 폭력이 아니다.
약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건 중요하다. 그런 도덕적 감정이입이 없다면 사회문제고 뭐고 환기할 수도 없다. 그런 한편 고통이 인간에게 도덕적 능력조차 보상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차별과 가난은 낭만이 될 수 없다. 약자도 나처럼 욕망과 속셈을 품은 인간이고, 보드라운 이불을 덮고 자는 나보다 독하고 절박할 수도 있다. 이런 냉정한 이해를 거친 후에 현실의 대안에 이를 수 있다. 인간과 권력을 보편적으로 제어하는 제도와 합의를 세우고, 먹이사슬의 세상을 수평적 구조로 평탄화하는 것이다. 물론 그런 장치들은 더 큰 폭력을 저지르는 강자들을 더 세게 옭아매도록 설계되어야 한다.
약자를 향한 도덕적 환상에서 헤어나야 한다. 고통의 멜로드라마에 관람료를 지불하는 시혜 행위와 그런 대상화가 덮어주지 않는 약자의 모습에 대한 실망이 냉소와 위악으로 번지는 걸 그럴 때 예방할 수 있다.